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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Dec 16. 2022

그냥, 음악 안에서 두둥실.

행복론과 불행론

   '들여다보면 문제없는 인생 없다. 알고 보면 사연 없는 집이 없다. 행복은 가까이 있다. 행복은 발견하는 거다.'이 모든 게 인생에 관한 명언이다. 불행론과 행복론 어느 것이 더 인기인가. 나는 행복론을 주장하는 자였지만 최근엔 불행론을 인정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결국 어느 경로가 맞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론자 쯤에 서서 방황을 노래한다. 두둥실 붕 뜬 마음이 혼란한 지금, 난 어디에 착지 발을 디뎌야 할까? 행복론과 불행론, 어느 곳이 더 인기인지 그런 데이터는 정리되지 않는 걸까? 난 다수결에 따라 그곳에 정착하고 싶을 지경이다. 일단 지금은 너무나 혼란하니까 말이다.         



   <즐거운 돌림노래>


   '삶은 원래 불행한 거야.'

   '행복은 잘 모르겠어.'

   '행복하면 작업 안 하지.'

   우연히 알게 된 한 작곡가는 늘 불행을 노래하고 불행을 논했다. 그의 삶은 한 찰나 불행한 면이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현재가 그리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먹고살만했고, 서럽지 않을 정도의 누워 잘 집이 있었고, 그를 아껴주는 가족과 그가 내치지만 않는다면 그와 노는 걸 마다하지 않을 사람들이 센티한 척하려고 드는 그를 웃겨댔다. 그런 그가 긍정을 노래하는 나와 인연이 닿았을 때, 난 종종 그에게 왜 그렇게 불행하려고 하냐고 물었다. 밝고 신나게 살면 좋을 걸 굳이 불행을 잊지도 잃지도 않으면서 그 깊이에 파고만 드는 그가 이해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오지랖 넓게도 난 매번 말의 말미에는 행복하라고 요구 아닌 요구를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도 질세라 인생을 통달이라도 한 듯, 인생은 불행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창작을 한다, 자신은 행복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며 꾸준히 나의 바람을 거부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순간에도 그는 그리 어두워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당장 내가 던지는 실없는 소리 한마디면 쿨럭하고 웃어버릴 테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불행을 인생의 멋처럼 여기고 살던 사람에게 나는 마지막까지 언젠가 당신의 노래가 행복하다고 노래하기를 기다리고 바란다라고 말했다. 불행 집착, 행복 집착 두 고집의 대화는 마지막까지 즐거운(?) 돌림노래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맞고 내가 경솔했다.>


   그에게 지지 않고 당차게 돌림노래에 박자를 맞추던 나는 애석하게도 머지않아 좌절하고 말았다. 불행이 이기나 행복이 이기나 해보자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자존심 상 그에게는 비밀이었지만, 난 폭풍우 같은 감정들을 한 몫에 받아내며 인간사는 불행한 거라고 고로 인간은 불행한 거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믿는 순간 또 더 불행해졌다. 그런 세상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도, 인간사의 운명도, 그러므로 인간인 내 운명도 너무나 불행했다. 그동안 내 시선은 얄팍한 껍데기에만 맺혀 맴맴 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긍정을 노래하던 그 시선이 그토록 경솔해 보일 수가 없었다. 또 불행 속을 허우적 대며 불행을 노래하던 그가 떠오를 때면 그가 맞을지도 모른다고 그를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인정 또한 불행했다.



   <화음 준비>


   내가 그를 서서히 인정해 가는 동안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변화를 잘하지 않으면서 고집 또한 있는 사람이었기에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당연시 여겼다. 그렇다면 그와 다시 마주치는 날 나는 나의 심경 변화를 이실직고하고 비로소 그의 마음을 잔소리 없이 다정히 들어주겠노라 그의 말에 화음을 맞춰줄 수 있겠노라 그렇게 다시 마주칠 날을 상상을 했다. '그래 인생은 불행해. 실은 내 인생도. 그러니 너도 나도. 그래 인생은 불행하니, 너의 창작물은 계속 불행하도록 해. 너의 노래를 들어줄 사람이 많을 거야. 다들 그러니까.' 즈음을 생각했던 거 같다.



   <멜로디의 경로 이탈?>


   나의 변화를 이실직고하기도 전에 찝찝한 느낌이 드는 창작물이 나왔다. 어쩐지 그가 행복한 게 아닌가. 아니, 내 시선 안에 그려지는 그는 늘 그의 창작물보다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단지 그가 인정하냐 안 하냐의 문제에 달려있을 뿐 보다 행복하려면 행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가 풍기는 느낌은 너무 많이 처량하지는 않았고, 내 유머 정도면 미소 이상의 밝고 즐거운 웃음을 웃어낼 수 있었고, 자신의 삶을 철저히 지키며 잘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품을 쓸 당시 그는 그만 실수로 인해 스스로의 진실을 새겨버렸다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진실이 흘러나와버린 거지. 감출 수 없을 만큼 행복이 와 버려서 넘쳐 버린 걸까? 하지만 이 순간 아이러니했던 건 이런 거였다. 그의 행복을 고집스럽게 바랬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걸릴 거 같지 않던 긍정의 마법이 결국 걸리기 시작한 거 같아 좋다가도 곧 불행을 노래할 그의 노래에 화음 쌓을 준비를 했다는 거다. 3도 화음쯤으로 맞춰 줘야지... 그리고 그가 나의 멜로디에 4도 화음을 쌓아주기를... 하고서 말이다.  짙은 색을 고집스럽게 내는 그는 여전히 불행에 취해 있을 테니까.



   <멜로디의 배신>


   믿고 싶지 않지만 그는 또다시 행복을 노래하는 창작물을 선보였다. 이번엔 더 직접적이었다. 이젠 행복할 거고 행복하고 싶단다. 꿋꿋이 불행의 멋에 취해있을 줄 알았던 그가 이토록 금방 경로 이탈을 해 버리다니. 명백히 그의 영향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미약하게나마 그의 영향력을 안고 불행해졌는데, 이건 그의 명백한 배신이었다. 내 화음은 어디에다 쌓아야 하는가.



   <우리는 박자가 참 안 맞고, 화음을 이룰 수 없는 멜로디를 부를 뿐이지만>


   행복을 노래할 때 불행을 노래하는 자. 불행을 노래하니 타이밍 맞게 행복을 노래하는 자. 뭐든지 타이밍이고 뭐든지 어울려야 조화를 이루는 거라면, 그와 나는 절묘하게 다른 박자와 색을 노래한다. 그래서 투닥투닥 쿵더러러러 쿵덕 마주하는 순간마다 각자의 사상에 딴지를 걸며 불협화음인 듯 아닌 듯, 안 섞이는 듯 섞이는 듯한 아리송한 대화로 각자의 노래를 할 뿐이다. 아마도 그 순간마다 우리는 늘 서로 다른 사상에 훼방을 놓고 거부감을 느끼는 척하면서도 은근한 영향력을 주고받으리라.



   <곡 해석>


   그의 행복을, 그의 작품이 행복해 지기를 바란 건 진한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그가 갑자기 행복을 노래했을 때에 우러나 온 감정이 꽤 석연치 않았던 건, 단지 나를 불행에 빠트려 놓고 쏙 빠져나간 그여서 였거나 같이 불행을 노래할 수 없어서였거나 여서는 아니었다. 행복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행복론을 노래하다가 굳게 믿던 그 행복론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사상에 관한 모순을 읽어내면서 불행론에 조금씩 마음을 내줌과 동시에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읽어가는 중이었는데, 불행론을 노래하던 학자가 그 학파에 대해 마음을 조금씩 돌려 제3의 다른 학파가 아닌 내가 막 마음을 등져버린 행복론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는 모습이 적지 않은 혼란을 불렀다. 불행 그곳엔 결국 행복 학파가 우세하도록 지어졌는가. 나는 어리석게도 역행을 하고 있는가. 얕고 경솔했던 내 시선이 불행을 읽으며 한 겹 더 깊어졌다 생각했는데, 내 시선은 어디쯤을 읽고 있는 걸까. 에 대한 석연찮음이었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멜로디의 역사는 돌고 돈다. 단순했다 화려했다 밝았다 어두웠다 다시 밝아지거나 단순해진다. 잔잔했다 격정적이었다 폭발적이었다 감미로워진다. 그냥 그런 것이다. 이런 멜로디가 흐를 때도 이런 멜로디가 흐르고 나면 저런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때도. 하물며 한 곡 안에서도 멜로디는 한 라인을 타지 않는다. 그 흐름은 곡이 완성되기 전까지 창작자조차도 아무도 모르는 것일 확률이 크다. 하지만 분명한 건 멜로디는 계속 조금씩 변화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연주자는 지루할 때쯤 변주를 불러내고 말 거라는 사실이다. 고로 그와 나, 또는 나와 닿을 다수의 인연들이 현생의 시간을 함께하며 나와 다른 박자와 멜로디를 가지고 놀겠지만 결국은 그들도 내 멜로디 안으로 나도 그들의 멜로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흘러 흘러 마지막 마디로 가는 과정에 불과할 뿐 틀린 경로는 없을 것이다. 음표가 5 선지 밖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결국은 세상 안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음가 안에서 흘러갈 테니. 다만 행복의 희망을 노래하든 불행의 슬픔을 노래하든 어떤 걸 노래하더라도 결국엔 어딘가에서는 귀와 마음이 열릴 수 있는 정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그런 노래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 돌고 돌아 우연히 다시 만나기도 섞였다 이끌었다 이끌리기도 하면서 합주를 만들어 낼 테니. 그게 어떤 것이든 마음이 악보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냥 흘러 흘러 두둥실 실어 보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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