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가 생각나는 밤
지역에서 운영하는 학사에 살고 있고, 최근 같이 농구하는 친구가 몇 명 생겼다. 수업이 끝나고 공을 빌려서 코트를 휘적거리고 있으면, 시간이 맞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이는 일상이 익숙해졌다. 학사생들과 함께 딸기밭 봉사를 다녀온 이야기나, 동물원으로 서울 나들이를 떠날 거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내심 기다릴 정도가 되었다.
오늘은 학사에서 룸메 다음으로 알게 된 T와 그의 딸기밭 봉사에 동행한 친구가 산책로를 뛸 거라며 농구를 하던 나를 불렀다. 뛰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고 함께 뛰는 걸 마다할 이유는 더욱 없기에 서둘러 공을 반납했다. 그 시간 동안 T는 나를 처음 만나게 된 이야기나 간단한 신상정보 등을 친구에게 미리 일러준 눈치였다. 지역 학사다 보니 T의 친구는 나의 출신 고등학교를 물었고, OO고등학교라 알려주었다. 일면식은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살았던 이야기는 어색함을 깨기 더없이 좋은 선택임을 공감했고 그 뜻을 나도 읽었음을 보여주듯 “저는 OO고등학교입니다!” 목소리도 높여가며 반갑게 답했다.
에? OO고에서 어떻게 우리 대학을 왔어요?
우선 같은 대학을 다니는구나 생각했고 이어 당황했다. 어떻게 왔냐니? 그래도 3개월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새내기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기색으로 괜히 삐딱하게 뻗어가는 생각을 꾹꾹 눌렀다. 나도 비슷한 결의 감정을 느낀 순간이 있었으니까. 외고나 자사고 출신 동기가 많았고 지방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수시로 진학한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던 때. 그렇다면 반대로 누군가는 우월감을 가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기분이 나쁘기엔 내가 비슷한 부류(?)의 발언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사람임을 상기했고, 괜히 본인이 더 눈치를 보는 T를 살피다 보니 움직이던 감정은 금방 가라앉았다. 그런데 T의 친구는 △△고등학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똑같은 평준화 일반고였고, 순간 ‘너나 나나 뭐가 그리 다르냐’ 생각으로 마음이 다시 울렁거렸다. 그는 “저 때는 A대를 0명 가고, B대를 0명 가고 엄청 잘 갔죠” 괜히 찔린 건지 묻지도 않았던 정보를 술술 늘어놓았다.
“아 제 동생은 □□고 나왔는데 거기 밑으론 다 또이-또이 한 줄 알았네요”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동생이 평준화가 되었지만 ‘비평준화의 전통’이 남아있어 입학 경쟁이 치열한 ‘대학 잘 보내는 명문’ 고등학교를 나왔음을 은근히 뽐내버렸다. 나도 참, 기분은 한껏 나빠하고 대학 보내기로 학교 수준 운운하는 건 똑같구나 싶기도 했고, 게다가 동생이 나온 학교까지 들먹일 건 또 뭐람. 그런 생각으로 머쓱해졌고 혼자 웃어버렸다. T의 친구는 나쁜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우호적인 태도로 대화를 이어갔으며, 그렇게 함께 뛰었다. 오랜만에 밖을 뛰는 날이었고, 내리던 비가 그친 후 바람도 선선했으며 하늘도 무척이나 예뻤으니까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쭈글쭈글 이렇게 글을 쓰는 걸 보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까지는 말하지 못하겠다.
방으로 들어와 6월 모의고사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기사를 보고 문득 D가 생각났다. 군대에서 후임으로 만난 D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문 외고를 나왔고, 만족스럽지 않은 성적으로 (물론 내 기준에는 우러러보는 점수대였지만) 재수 삼수 시절을 보냈다. 지금 나는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N 수를 끝으로 D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올해 초 연락 때 D는 다시 수능을 준비하고 싶다고 했고, 이번에는 명문 외고 수준에 맞는 대학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기 위함이라 했다. 그렇게 또다시 별다른 맥락 없이 생각난 D에게 생색을 가득 담고 호들갑을 떨며 어디선가 받은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보냈다.
하릴없이 심심하게 시간을 죽이는 야간근무를 서로의 이야기로 채우던 날들이 떠올랐고, D에게, 다만 행복 하자 그렇게 속으로만 전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