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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lora Nov 16. 2022

나에게 있어서 좋은 디자인이란

   삶, 좋은 디자인의 주관적 정의






                                    나에게 있어서 좋은 디자인이란, 

                     감성으로 소통하고 이성으로 침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빠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이성적이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차분하게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지, 나는 그것이 참으로 놀랍고도 존경스럽다. 반대로 우리 엄마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 주고 같이 아파해준다. 나는 아빠의 이성을 존경하고 엄마의 공감에 잔잔한 감동을 느낀다. 내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따듯한 공감과 냉철한 이성은 경중을 나눌 것 없이 참으로 소중한 것들이다. 


  그럼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엄마 같은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학교 과제에서 주변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지 물어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봤을 때 나는 다소 이성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사람에 가까운 것 같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안다. 내가 이성을 갈망하고 성취에 대한 욕심도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도 알고 보면 굉장히 관계지향적인 사람이다. 다만 관계에 쏟을 수 있는 나의 에너지가 굉장히 한정적이어서 소수의 사람에게만 그것을 쏟을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꽤 신경 쓴다. 때로는 내가 신경 안 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괜한 자존심에 오히려 더욱 내 줏대를 가지고 행동할 때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쓴 것이다. 마치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처럼 말이다. 그 쓸데없는 자존심은 나의 튼튼한 줏대를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어쩔 때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기도 하다.


  또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것이 느껴지면, 나는 그것을 고슴도치의 가시 뿌리까지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낀다. 내 눈치가 빨라서 좋을 때도 있지만 어쩔 때는 눈치가 참 눈치 없다고 느낀다. 그러면 나는 최대한 그 상황에서 괴로워하는 나를 빼내기 위해 더 크고 넓은 세상을 상상한다. 그렇게라도 나를 그 상황에서 빼내고 싶은 것이다. 물론 나도 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 없음을. 동시에 모두가 나를 싫어하지도 않기에. 하지만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인생을 살면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행이 찾아올 때, 항상 아빠의 이성으로 행동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나는 또 안다. 지옥은 끝도 없는 구덩이이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아빠의 이성으로 행동하려고 하는 것 같다. 왜냐면 나는 내가 이성적이기만 한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받는 일은 언제나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고 슬프다. 무뎌지지 않는 것 같다. 그 대상에 대한 나의 애정이 클수록 더 아픈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처나 상황들은 내가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침묵으로 기도할 뿐이다.




  나도 어릴 때는 크게 신중함도 없고 계산 없이 순수하게 바로 말을 내뱉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자라갈수록 침묵의 중요성을 느낀다. 침묵은 곧 이성인 것이다.

이성을 기반으로 한 침묵은 나를 지켜주기도 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침묵함으로써 나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선택의 리스크를 줄이며, 주고받는 상처의 양을 감소시킨다. 하지만 가까운 이들에게는 엄마의 감성을 기반으로 한 따듯한 소통을 하려고 한다. 또 그것을 진심으로 간절히 원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라기엔 너무 감성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라기엔 너무나도 이성을 발버둥 치며 끄집어 쓰는 사람이다. 사실 지금 글을 쓰는 이 행위도, 내가 나의 이성을 끌어다 쓰는 행위이기도, 진심으로 아파하고 슬퍼하는 나의 감성을 표출해 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의 인생에 불현듯 찾아오는 힘든 시기가 싫지만은 않다. 그때 겪는 고통과 상처는 누군가에게 감성을 바탕으로 한 공감과 소통이자 사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상처를 받아봤기에 상처받은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고, 나는 그것이 감사하다. 마치 상처를 받아본 우리 엄마가 나의 상처를 따스한 공감과 위로로 감싸 안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도 아빠의 이성을 기반으로 상황이나 문제를 바라보고, 엄마의 감성을 기반으로 진심 어린 공감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상처 많은 디자이너이자 아빠로 침묵하고 엄마로 소통할 줄 아는, 감성과 이성을 오가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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