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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민 Mar 02. 2024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사랑하는 배우자 혹은, 지인의 갑자스러운 이별에 우린 죽음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나도 언젠가 사고가 날 뻔하거나 나에게도 아찔했던 순간들은 나를 일시적으로 내 머릿속을 까맣게 물들여 버린다. 누군가는 죽음이라는 존재를 빠르게 알아차렸거나 누군가는 늦게 알아차릴 수 있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비보, 장례식장에 울리는 곡소리는 나와 관련이 없더라도 언젠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잠기게 만들고 불의의 상을 당한 누군가에게 연민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태어나 눈으로 어머니를 보고 코로 숨을 쉬며 살아있다는 감정을 처음 느끼게 된다. 죽는 순간의 느낌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 자연사조차도 편한 감정은 아니라고 한다.


가끔 때때로 나는 어두운 방에서 언젠간 사라질 나를 상상하며 내가 없는 가족의 모습, 텅 빈 방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그러면, 항상 삶의 공허함과 닥쳐올 죽음의 공포에 무기력해져 갔었다. 마치, 멀리서 칙칙 거리며 다가오는 화물차 앞 레일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부정하고 싶은 미래지만 내 이성과 감정은 밧줄로 돌돌 묶여 죽음이라는 열차를 보고있지만 저항할 수 없는 걸 깨달아버린다. 그래서 나는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있는 작은 블랙홀이 사그라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죽음은 부정할 수 없고 오로지 수용으로만 다스릴 수 있는 일종의 신의 명령 같은 것이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는 신조차 모를 수 있겠지만 태어나 숨 쉬는 존재가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종교를 통한 영생을 주장하지만 46억 년 긴 세월 지구에서 영원히 살아있던 생명체는 없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순간조차도 죽음은 실존했고 냉정했다. 수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도 삶이라는 영화 마지막에 죽음이라는 종지부를 찍어야 영화는 끝난다. 모두가 출발선이 같지는 않지만 삶의 종결이라는 끝선에 도달해 공평하게 한 줌의 재로 돌아간다.


죽음은 신이 빚은 인형들이 다시, 다른 인형을 만들기 위해서 반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감정이라는 것을 선물해 줬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생물보다 더 행복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움을 느낄 수 있고 죽음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흙 한 줌에 바다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퍼오고 구름을 조금 떼고 입김을 불어넣어서 사람을 만들었다. 우리의 자아는 신이 불어넣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신이 만든 인형이 낡아 다시 흙과 물과 공기인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기억은 사라지고 같이 있던 사람도 멀어지고 나도 원래 상태로 돌아갈 뿐이다. 신은 돌멩이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사람과 동물을 만들고 수십억 년의 지루한 우주 속의 기나긴 돌멩이의 삶을 가엾게 여겨 잠깐의 재밌는 기억을 만들어주고자 삶을 만들어주었다. 우리 주위의 작은 생물들을 천시하지 말고 작은 돌멩이조차도 함부로 여기지 않는 부처의 마음을 조금 길러보면서 삶을 돌아보고 값진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며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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