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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엔 Jan 20. 2020

천천히 마음이 식던 나날들

어떻게 홍콩에 왔더라


원하지 않았던 기관에 입사한지라 입사 후 내내 퇴사를 염두에 두었지만, 그래도 내가 회사에 애정을 쏟은 기간이 있었다. 팀을 옮긴 후, 약 6개월 정도. 업무를 서서히 배워 나가는 기간이었다.


그때 막 접한 자기 계발 채널에서 한창 ‘자기의 것’과 ‘능력’을 강조하던 때라 파릇파릇한 나는 그 말이 너무 설렜다. 내가 지금 무언가를 쌓아두면 이를 바탕으로 내가 성장해서 다른 길이 놓일지도 모른다는, 힘든 취업이었고 원하는 곳도 아니었지만 여하튼 당장 이 곳을 떠날 수 없다면 더 큰 도약을 위해 더 튼튼한 발판을 쌓아두어야 한다는, 그런 기대와 의무감이 나를 채웠다.


그리고 기대가 있어선지 6개월은 일을 하면서 가끔은 신나고, 가끔은 보람 있었다. 대충 던진 일을 몇 날 며칠을 고민해 내 방식대로 풀었고, 그건 확실히 나만의 성과였다. 아쉽게도 퇴사하면서 그 모든 자료도 남겨놓고 나와야 했지만. 그 6개월 동안 나는 혼자 야근을 해도, 혼자 정신없이 바빠도, 혼자 제출해야 하는 자료를 고민해야 하더라도 불만이 없었다. 곧 익숙해진 후에는 충분히 내가 조절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6개월이 지나고 서서히 나는 알아갔다. 팀원이 점점 늘어나지만 일을 잘하는 것보단 좋은 이미지로 남는 것이 더 중요해 커피와 다과를 먼저 나눠주고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이 우선순위이며, 일은 결국 하는 사람만 하게 되는 이 조직에서는 애초에 칼퇴가 답이었다는 걸.


참 아쉽게도 내게 남은 지식과 기술도 얼마 없었다. 새로운 조직에 와서 주위를 둘러보니 보고서라고는 80%가 주어진 포맷에 내용만 채우는 업무였고 문서를 잘 쓰는 사수도 드물던지라 내 문서도 비슷했다. 여전히 잘 포장한, 기대 목표가 뚜렷한 문서는 어렵다. 또, 내 전공과는 무관하며 너무 특화된 팀으로 갔던 탓에 애매하게 쌓은 지식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딱 7-8개월이 지나던 시점에 알아버렸다. 이게 별 의미가 없는 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당연하게 노력도, 재미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한 달은 파일을 정리하는 습관을 만드는 데에, 그다음 달은 해외출장을 가는 경험을 쌓는 데에 의미를 두며 당장 떠나버릴 수 없는 시간을 견뎠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홍콩에 있구나’ 싶은 마음이 내 마지막 위안인 지금,

참 다행이야. 퇴사해서.


해외출장
해외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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