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정부의 출국금지 조치로 영화제 출품조차 불가능했다. 영화제 폐막 3일 전, 겨우 상영하게 되어 경쟁작 명단에도, 영화제 공식책자에도 실리지 못한 채 출품된 영화는 그해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체리향기>에 얽힌 비화는 극적이지만, 정작 영화는 권태롭다.
뽀얀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흙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건조한 표정으로 운전하는 한 남자. 남자는 옆자리에 사람을 바꿔 태워가며 종일 차를 몬다. 모래와 먼지가 전부인 이곳에서 남자는 눈앞에 놓인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린다. 그는 수면제를 먹고 구덩이 속에서 잠든 자신의 몸 위로 흙을 덮어줄 사람을 찾는 중이다. 자동차 바퀴에 흙과 자갈이 짓이겨지는 소리, 흩날리는 모래와 굴러다니는 자갈들로 건조한 화면. 죽기 위한 여정이 참 지루하다.
남자는 죽기 위해 모래언덕을 달리지만, 노인과 청년들은 살아가기 위해 모래언덕에서 일한다. 나란히 겹쳐지는 죽음의 무덤과 생의 일터. 누군가 내일은 죽기 위해 언덕을 오르고, 다른 누군가는 내일을 살기 위해 언덕을 오를 것이다. 남자가 온종일 죽음을 생각하는 동안에도 인생은 지겹게 흘러간다.
남자는 끝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말한다. 자신도 한때 죽기를 결심하고 나무에 올라간 적이 있다고. 죽음의 문턱에서 맡은 새벽의 체리 향기, 주저하는 동안 떠오른 아침 해, 등교하는 아이들, 달콤한 체리 과즙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다시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남자는 노인의 길고 긴 고백을 묵묵히 듣기만 할 뿐이다. 고통에 잠식당한 남자는 과연 다음 날 눈뜨지 않을 수 있을까.
고통은 잠시간 머무른다. 하지만 고통은 존재감이 너무나 커서, 고통이 사라진 다음에도 삶이 온통 고통스럽다고 느끼게 만든다. 고통이 부재한 자리에 대신 권태가 들어선다. 권태는 쉽게 합병증을 동반한다. 이 상태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불안한 몸과 마음으로 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좌절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권태도 찰나의 체리 향기에 균열이 생긴다.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는 한 모금 체리 과즙. 곳곳에 비극이 가득한 이 세계에서 어떻게 체리 한 알로 살아가나 싶기도 하지만, 별수 있나 일단 깨물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