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ival, 영화 <컨택트>를 보고
글 킴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잔뜩 있음
지랄 맞은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삶을 욕망과 권태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와 같다고 정의해버렸다.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시계추가 마치 나태지옥을 떠올리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권태지옥의 원인이 욕망이기 때문에 금욕적인 생활을 하라고 했다. 가난해보지 않은 철학자가 금욕을 운운하니 웃기기도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욕망 덩어리길래 시계추 같은 삶을 살아야하나.
얼마 전에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를 다시 봤다. 또 보고 싶은 영화였다. 그 외 감독의 작품으로는 얼마 전 개봉했던 <듄>과 2011년 작품인 <그을린 사랑>등이 있다. 세련되고 웅장한 느낌이 <컨택트>와 <듄>을 이어준다. <컨택트>는 권태에 대해 쇼펜하우어와는 다른,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언어학자인 루이스가 외계에서 온 생명체와 소통하는 이야기인데 이 외계생명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지 않는다.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를 순서대로 밟아나가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닌 원 형태의 동그란 문자를 사용하는데 이 동그란 문자는 처음과 끝이 나누어지지 않고 시간의 흐름으로 읽을 수 없는 문자이다. 루이스는 이 언어를 ‘헵타포드 언어’라고 이름붙이고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를 알게 된 루이스도 외계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시간에 대한 사고가 달라지게 되고 곧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영화는 루이스의 어린 딸이 죽는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이 영상은 중반과 후반부까지 나오면서 그 퍼즐을 맞춘다. 딸의 죽음이 과거에 있었던 일처럼 보이지만 곧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만 그 남자와는 이혼하고 딸은 젊은 나이에 죽게 되는 미래, 그 미래가 오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루이스.
모든 것을 알면서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알게 된 미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루이스는 모든 것을 받아드리고 이미 알고 있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살아간다. 어찌보면 운명에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모습 같다. 하지만 루이스가 미래를 받아드리는 이유는 현실에 있다. 알면서도 꿋꿋하게 행하는 모습이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더욱 능동적인 모습처럼 보였다.
영화의 본래 제목인 <arrival>은 도착이라는 뜻이다. 사건을 지나 어느 시점에 도착할 때 그 도착은 보통 미래에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제가 없는 언어로 도착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닿아있는 매순간이 도착일 것이다. 권태의 시계추를 멈추는 방법은 내가 움직이는 이 순간까지도 도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