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은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첫 장을 ‘낭만적 운명론’으로 시작한다. 사랑은 현실 속에서 현실적 존재인 사람들 사이에서 생성되지만 역설적이게도 ‘낭만’이라는 색채를 지닌다. 사람들이 한 번씩 꿈꾸는 낭만적인 사랑은 필연 우연히 길을 걷다가 이상형을 마주치는 운명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내 첫사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대학 생활이 무료해질 무렵, 공기에서 차가운 겨울 냄새가 막 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KFC 마감 알바를 마치고 편의점 마감 알바를 마친 친구와 함께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키 큰 남자 두 명이 갑자기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곤 그중 한 사람이 물었다 번호 좀 알려줄 수 있냐고. 술자리에서 흘려 들었던 얘기와 유사한 상황, 부끄러운 듯 내 앞에 서 있는 남자, 옆에서 얼른 번호를 주라며 호들갑을 떨던 친구 삼박자가 아주 잘 맞았다.
p. 19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이며,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단점을 꿰뚫어 보고자 하는 습관을 포기하고자 하는 의지는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유발하고, 이는 우리가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도록 하는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한다.
번호를 물어보던 남자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막연히 생각했던 키가 큰 남자에 큰 소리를 낼 줄 모르는 다정한 사람이라는 조건에 부합해 보였고, 그 사람에게 난 잘 웃고 순하며 밝은 사람이라는 조건에 부합해 보였다. 이러한 서로에 대한 이상화는 우리가 운명이라는 막연하게 믿고 싶은 가정이 확신으로 가장되어 보이도록 하였다.
p.70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는 매우 온전해 보이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매우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하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가장된 확신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들통나기 마련이다.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될수록, 서로가 서로의 삶에 일부로 자리 잡을수록 쌀쌀하던 늦가을 밤 내 앞에 서 있던 그 사람은 이제 나에게 큰 소리를 내는 차가운 사람이 되었고, 그 사람에게 나는 잘 울고 소리 지르며 우울한 사람이 되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함께한 시간 동안 더 이상 이상적 존재가 아닌 내 옆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이상 서로에게 가지던 낭만적 이상에 생기는 균열들을 막을 방법을 찾을 수 없었고 그렇게 찬란하던 우리들의 사랑은 서서히 이별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