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이 뜨기 전에 Aug 16. 2022

엄마의 낡은 서랍장

2. 연필이 또르르

엄마는 뭐 좋아하셨지? 의사 선생님이 엄마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 대사나, 뭐 이런 소리를 틀어놓아 보라는데, 난 사실 몰라서. 언니는 알아?    


아니... 나도.. 나도... 잘 몰라    


음악, 영화... 엄마랑 영화 본 지가 언제였더라... 엄마는 활기찬 음악을 좋아하셨나? 잔잔한 음악을 좋아하셨나? 엄마가 좋아한 것은 뭐였더라...    


은희는 엄마의 집으로 갔다. 최근에 이사를 오면서 옛날 짐들을 많이 정리한 탓에 엄마의 물건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엄마의 방으로 들어가서 아직 정리되지 못한 박스들을 살펴보았다. 보자기에 싸인 짐을 풀어보기도 하고, 상자 속을 뒤적이다가 뭔가 쿵하고 떨어졌다. 

보자기를 풀어보니 작은 서랍장이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낡은 서랍장이었다. 더구나 지금 떨어뜨린 까닭에 그나마 성했던 모서리까지 부서졌다. 이렇게 오래된 서랍장을 엄마가 아직도 가지고 계신 것을 보면 뭐가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은희는 서랍장을 조심스레 보자기에 다시 싸서 병원으로 가져갔다.        


언니, 지금 눈도 못 뜨시는 엄마가 이 서랍장이 뭐가 의미가 있어? 더구나 이렇게 깨져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것을 왜 여기까지 가져왔어?    


동생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은희는 깨진 모서리를 테이프로 감싸며 말했다.    


이렇게 오래된 서랍장을 아직도 가지고 계신 거 보면, 엄마가 소중히 생각하신 거야. 생각해보면, 어릴 적에 언뜻 이것을 본 기억도 나... 눈을 감으셨으니 이렇게 엄마 손에 쥐어지면 되지.    


그렇죠? 엄마? 이거 엄마가 소중히 생각하는 거 맞죠? 이거 만져보세요. 엄마가 가지고 있던 서랍장!.    


은희는 힘없이 자꾸만 미끄러지는 엄마의 손을 다시금 붙잡고, 엄마가 서랍장의 감촉을 느끼게 했다.        


동생은 마땅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언니가 노력하는 것을 굳이 막지는 않았다.    


난 이제 돌아갈게 주말 잘 부탁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피곤에 지친 동생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은희는 엄마의 얼굴을 계속 살폈다.    


그래 수고 많았어. 가서 좀 쉬어!    


은희는 엄마의 손과 서랍장을 붙잡고 엄마의 눈만 계속 바라보았다. 엄마가 눈을 조금만 찡긋해도 은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참을 엄마의 침대 곁을 지키던 은희는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주말의 시간을 비우느라 평일 내내 야근을 한 탓에 몸이 천근만근이 되었다. 은희는 서랍장을 침대 곁에 내려놓고 소파에 누웠다.     

그러다 겨울 햇살에 눈을 떴다. 새벽에 와서 엄마의 상태를 체크하는 간호사를 언뜻 본 것 같았는데, 벌써 오전이 다 흘러가 버렸다.  


엄마는 여전히 누워만 계셨다. 엄마 옆으로 가서 다시금 손을 잡는데, 연필 하나가 침대 밑으로 떨어져 또르르 굴러갔다. 연필을 주워 보니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침대 위에 연필이 왜 있지? 내가 어제 가지고 온 서랍장에서 나온 건가?    


은희는 서랍장을 열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연필의 그림은 크림트의 그림이었다. 어릴 적 엄마와 함께 미술관에 갔던 기억이 났다. 엄마가 사준 연필이 생각났다. 그때 그 연필인가? 하지만, 어떻게 이 연필이 여기에 있지?      


마침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은 별일 아닌 듯...    


서랍장에서 나왔겠지... 어제 정신없어서 잘 몰랐을 거야.    

그래.. 그랬겠지?    


은희는 엄마에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건넨다. 엄마의 손도 주무르고, 뽀뽀도 하며, 어릴 적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은희는 오후의 나른함에 속절없이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또 소파에 앉아 졸기 시작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낡은 서랍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