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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귤 Sep 02. 2023

통돌이 세탁기

생각 2.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신혼 때 장만한 통돌이 세탁기가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탈수 시 "덜덜덜", "텅텅" 하는 굉장한 소리가 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먼지거름망에 먼지가 걸러지지 않는 것이다. 5년이 넘게 부지런히 돌고 돌았던 우리 집 통돌이가 갑자기 왜 그럴까? 바꿀 때가 되었나? 세탁기 가격도 만만치 않은데... 근심이 머릿속을 돌고 돌았다.


집안일을 하다 보면 물건에도 꽤 많은 손길과 관심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생김새와 쓰임새도 다르지만 저마다 있어야 할 위치와 해내야 할 역할도 다르다. 가족 한 사람이 아프면 온 가족이 함께 아프듯, 물건 하나도 고장 나면 집안일에 큰 타격을 입는다.


좀 아픈 통돌이를 보며 '조금만 더 버텨줘' 속삭이다, 세탁기 앞에 붙어있는 바코드를 발견했다. 밑에는 "간단 조치 서비스 접속을 통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있었다. '그래, 생각보다 쉽게 해결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고장접수부터 해보자.'


그렇게 기사님이 방문했다. "위이이잉~~" 드릴 소리 같은 것이 몇 번 나더니 세탁기 아랫부분의 세탁판이 분해되었다.


"와~~~"

기사님이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왜? 고장이 났나? 엄청 더럽나?'

세탁실로 후다닥 뛰어갔다.

"고객님. 세탁기 관리를 너무 잘하셨네요? 우와! 제가 요 근래 본 세탁기 중에 제일 깨끗합니다."

"정말요?(히히)"

나도 모르게 안도의 웃음이 났다.

"먼지거름망에 먼지가 없는 건 너무 깨끗해서 그래요."

"네? 근데 저번에는 먼지가 나온 적도 있었는데 왜 갑자기 아예 안 나오는 걸까요?"

"지금 제가 확인해 보니 세탁기 안이 너무 깨끗해서 먼지가 쌓일 틈 없이 물이 빠져나갈 때 먼지도 같이 빠져나가버려서 그런 것 같네요."

"그럼 탈수할 때 소리 나는 건 괜찮은 건가요?"

"세탁기 안에 받쳐주는 스프링이 4개가 있거든요. 눌러봤을 때 힘이 없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고객님 세탁기는 아직 힘이 있어요. 수평도 잘 맞고요. 통돌이는 탈수할 때 옷이 서로 잘 엉키고 한쪽으로 쏠리는데 그때 소리가 크게 나는 것 같아요. 전원 버튼을 눌러서 잠시 멈추고 옷을 고르게 정리한 다음, 다시 탈수하면  됩니다."

"아! 그럼 고치거나 바꿀 필요가 없는 거네요? 감사합니다."

"고객님 세탁기는 바꾸기 너무 아까워요. 더 오래 쓸 수 있어요. 계속 쓰시죠."


기사님은 손본 게 없다며 출장비도 받지 않고 쿨하게 가버리셨다. 정든 통돌이를 떠나보내게 될까 봐 내내 걱정했던  마음도 쿨하게 나갔다.


세탁기도 통돌이냐 드럼이냐, 엘지냐 삼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겉모습과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힘이라는 것. 나만의 쓰임이라는 것. 소리가 좀 나도, 어디 하나 작은 부족함이 있어도 아직 생명력이 있는, 튼튼한 세탁기는 계속 돌아간다. 교체되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계속 쓰인다.


깨끗한 세탁기는 먼지가 쌓이지 않는다. 옷의 먼지들이 물과 함께 빠져나가버린다. 걸러질 것이 없고, 남아있는 찌꺼기가 없다.


우리도 세탁기 같다. 돌고 도느라 바쁘다. 돌고 돌다 때론 덜컥 고장이 난다. 아프기도 하고 남들보다 뒤처지기도 하고 볼품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면의 힘이 있는 사람은 다시 일어선다. 생각과 마음이 튼튼한 사람은 이겨낸다. 모든 살아있는 사람은 그대로 살아갈 가치가 차고 넘친다. 그것이 생명력이다.


우리 마음에도 먼지가 있다. 쌓이고 쌓인 먼지가 있다. 상처와 아픔이다. 깨끗하게 흘려보내야 한다. 남아있지 않고 쌓여있지 않도록. 깨끗한 물, 위에서 아래로 흘러 흘러 생명을 살리는 물. 그 물과 함께 먼지는 빠져나간다.


어떻게 하면 계속 쓰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상처와 아픔에 매여 살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세탁기를 보며 고민했고,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눈부시게 지는 노을을 통해 찾았다.


아침에 힘 있게 돋았다 저녁에 아름답게 지는 해처럼.


아침마다 다시 일어나고 밤마다 흘려보낼 때, 오래오래 돌아가는 세탁기처럼 살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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