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가 되고 "작가소개"란을 적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려한 이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쓸 게 없어서 시간만 오래 걸렸다. 다른 사람들의 프로필을 힐끗힐끗 보니 주눅이 들었다. '다들 화려하구만, 뭐 이리 내세울 것이 많은거여?' 조금 자랑할만한 이력이 떠올랐다가도 먼 과거형이 되어 먼지 날리거나, 고작 몇 자 쓰였다 마침표 찍을 이야기가 다였다. 과감하게 다 지워버렸다.
그래, 나는 진짜 '나'에 대해서, 나는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어떤 작가로 기억되길 원하는지 생각해 보자.
아주아주 작고 이름 모를
돌 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와 귀여운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꽃처럼.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동생이 태어난 때=아빠가 대장암 선고를 받던 때) 아빠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 글에서 나는 '돌 틈에도 피어난 꽃'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건 곧 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예쁜 꽃들이 함께 피어있는 꽃밭이 아닌 곳에서 피어났지만 쉽게 죽지 않는, 꿋꿋한 돌 틈의 꽃이 꼭 나 같았다. 그 글 속에서 나는 "여기 나도 폈어요!"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 글은 당선이 되어 책자에 실렸고 적지 않은 수상금도 받았다. 하지만 점점 커가면서 나는, 돌 틈에 핀 내 삶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싶었고, 차라리 밟혀 죽는 것이 낫다며 스스로 저주하기까지 했다.
시간이 흘러 30대가 된 나는(=엄마가 된 나=다시 글을 쓰고 있는 나) 브런치 작가소개에 '돌 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와 귀여운'이라는 표현을 다시 썼다. 심지어 '귀엽다'를 덧붙여서.여전히 나는 돌 틈에 피어난 꽃이다. 태생이 돌 틈이다. 흙수저다.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내 이력이고 자랑이 되었다. 돌 틈이 나만의 이야기가 되었고, 고만고만한 삶의 친구들에게 작은 위로를 주며 산다.
아주아주 작고 이름 모를
나는 큰 꽃보다는 작은 꽃이 좋다. 누구나 알아보는 유명인보다 이름 모를 이가 남긴 아름다운 이야기를 사랑한다. 백마 탄 왕자보다 어린 나귀 타고 온 예수가 더 좋다.
돌 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와 귀여운
나는 넓은 정원에서 자라는 꽃보다 돌 틈 새 핀 꽃이 좋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화려한 꽃보다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가던 걸음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고픈 돌 틈 새 삐죽 튀어나온 꽃이 좋다. 완전한 보름달보다 손톱만 한 초승달이 좋다.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꽃처럼
도토리 키재기 하듯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볼 때 너와 내가 딱이렇게만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뭇잎 하나 가지고도, 살랑이는 바람 한 점에도 재잘재잘대는 아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