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유난히도 길었던 이번 겨울. 그 끝자락에서 새로운 시작들을 바라보는 것이 별나게 기쁘다.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과 둘째의 유치원 입학을 치러내고 한숨 돌리니 곳곳에 꽃이 펴있다. 뱃속 셋째도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저 나름 하는지 꼬물꼬물 태동한다.
새로운 시작들 앞에서 나는 왜인지 지나간 시간들이 자주 떠오른다. 아이와 함께 걷는 등굣길에서 혼자 걷던 어린 내가 떠오르고 아이 필통에 짧은 편지를 넣고 보니, 나 학교 다닐 때 울 엄마가 수저통에 넣어줬던 편지들이 떠올랐다.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다니던 어린 내가, 많은 친구들 속에서도 때때로 이유 없이 외로워지곤 했던 어린 내가 보였다. 아이의 가방을 챙기고 또 챙기다 보니 내 가방을 미리 싸놓던 아빠가 생각났다. 아침에는 뭐라도 꼭 먹고 가서 하루를 든든하게 보내길 바라는 마음이 되고 보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밥을 챙겨주던 부지런한 엄마 뒷모습이 생각난다.
아이 손을 잡고 걷는 등하굣길에서 나는 엄마이자, 내 딸과 나이가 같은 한 아이가 된다. 모든 것이 새로운데 나는 왜인지 지나간 장면들을 펼치며 걷는다. 난 분명 자랐는데 또 그 시절 그대로이기도 하다. 어제 일은 가물가물하기만 한데 아주 오래전 그 어느 때 그곳에서 누구와 함께였는지 그 공기와 분위기, 냄새 같은 것들이 여전히 또렷한 건 왜일까? 난 어떻게 무사히 여기까지 왔을까? 내 어린 자식들은 보고 있어도 애틋하고 불안하기만 한데 이리 흔들리는 나는 어떻게 하루하루 컸을까?
아이들의 가방 멘 뒷모습을 볼 때 딱 저 무게만큼만, 어깨를 짓누르지 않을 만큼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길, 저 작고 작은 등들이 힘겹지 않고 힘차게 걸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다보면 내 마음이 꿈 많던 어린 나에게 닿는다.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본 것만 같은 푸르디푸른 광활한 스위스 알프스 어느 마을에 앉아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는, 큰 세상을 꿈꿨고 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불속에 누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요 작은 세상에서 참 작은 한 사람일 뿐이다. 작아진 내가 나보다 작은 내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는 뭘 잘할까?"
"엄마는 딸 돌보는 거 잘하지!"
그래, 나는 내 딸이 인정하는 딸을 잘 돌보는 나는, 두 딸을 잘 돌보는 나는(곧 아들도 돌봐야 할 나는) 너희에게 있어 큰 세상이고 큰 사람이구나. 나는 너희로 인해 꿈을 이뤘고 이 겨울의 끝자락에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다. 내 아이들의 옛 추억이 될 지금을 아름답게 보내어가는 것. 그것이 봄맞이 내 새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