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보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가 물었다.
"요즘 개근거지라는 말이 있다며? 진짜 그래?"
"그러니까. 그런 말이 있다더라. 애들이 그런 말을 쓰겠냐? 다 어른들이 하는 말 듣고 쓰는 거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성실함이 기본이지!
"성실한 거는 다 옛날 말인가 봐. 우리 옆동네에서도 애들이 실제로 개근거지라는 말을 쓴대. 우리 애들도 그런 말 안 듣게 하려면 해외여행도 많이 다녀야 하는 건가? 너네는 자주 다녀?"
"다른 지역으로 여행은 종종 다녔지. 애들이랑 해외는 안 가봤어. 우리 애들은 아직 비행기도 안 타봤어. 안 그래도 비행기 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던데 한번 타보긴 하려고."
"그래? 아휴. 걱정이다."
"어쩌겠니. 휘둘리지 않게 잘 키워야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내가 잘 키워야지. 비교하면 끝도 없으니 지금 가진 것에 집중해야지 뭐."
"그래. 너처럼 심지가 굳게 키우면 되겠지만 어후, 나는 엄두가 안 난다 야."
친구 앞에서는 심지가 굳은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한동안 내 머릿속에 '개근거지'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 아이들은 해외여행을 간 적이 없고 비행기도 안 타봤다. 몇 번 결석한 적이 있긴 하지만 해외여행이나 교외 체험 학습 때문에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빠진 적은 없는 '정근거지' 정도 되겠다. 내가 어릴 땐 "아파도 학교 가서 아파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졸업식 때 개근상을 받는 친구는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대상이었다. 개근상은 지난 세월을 착실하게 살아온 결과에 대한 보상이자 자랑스러운 열매였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날에도 '가야 할 곳에는 가야 한다,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라고 가르쳐왔다. 나의 이 생각이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개근거지'라는 말을 듣게 한다면 매일매일 쌓아온 나의 집과 자녀들의 삶은 정말로 거지꼴이 되는 걸까? 그 시절 한없이 성실했던 우리 어른들과 개근상을 품고 당당히 걸어온 아이들의 삶은 거지 같은 것일까?
나는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단칸방에 살았다. 다락방이 있던 집도 있었고 화장실이 밖에 있어 부엌에 요강을 두고 산 적도 있다. 곰팡이가 많아 비염을 선물한 집도 있었고 푸세식 공동 화장실을 써야 했던 적도 있었다. 달동네에 살 때는 산에서 내려온 어떤 작은 짐승이 집 안에 들어온 적도 있었다. 단칸방이 부끄러워 우리 집에 놀러 오겠다는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느라 곤란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가난했지만 다행히도? 거지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항상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것을 먹으며 자랐지만 날마다 자기 자리를 지켰던 엄마와 선생님, 친구, 이웃들이 있어 그 시절을 추억하는 오늘을 살게 되었다. 그들의 성실함과 열심이 지금 내게 그대로 이어져왔다.
우리 아이들에게 아직 해외여행을 선물해주진 못했지만 아침마다 밥을 짓고 집을 깨끗이 정돈하고 아이들이 편안히 뒹굴거릴 몸과 마음의 공간을 가꾼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속에 날마다 새로운 사랑을 채워둔다. 이 시대의 상황에 맞게 아이를 키워야 하지 않겠냐고, 내 자식이 개근거지라고 무시당하지 않게 하려면 당장 비행기표를 찾아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내 자식들 역시 개근보다 해외로 출석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보다, 아이들이 학교와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더 나아가 삶을 대하는 자세가 개근이라는 단어 옆에 거지를 붙인다는 거다. 나는 해봤고 가져본 것을 너는 하지 못한다고 가지고 있지 않다고, 조롱하고 비하하는 마음들이 교실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이 아프다. 그 아이들이 자라 살아갈 세상은 허물어진 궁전 같을 것이다. 견고한 성은 성실한 사람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고 아름다운 학교는 아이들이 가득하기 때문이고 좋은 세상은 매일의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개근부자'가 되면 좋겠다. 매일매일 그 자리에 차곡차곡 쌓인 아이들의 하루는 여행지에서 만난 그 어떤 유명하고 높은 산이 흉내 낼 수 없는, 누구나 쉬어가는 아름다운 동산이 될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하루하루 버텨낸 사람,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겐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될 수 있다고. 지금 네가 선 그곳에서 이미 충만히 가졌다고. 거실 소파에서 엄마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내 아기와 오늘도 집을 나선 나의 개근부자 두 딸에게, 그리고 귀하고 귀한 이 시대 어린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