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차. 55,000걸음을 걸었다.

어제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by 양송이타파스


5일차경로.JPG


그동안 내 체력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움직였던 결과를 너무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오늘은 동키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어제 호스피탈레로에게 받아 둔 봉투에 돈과 목적지를 적은 뒤 가방에 묶고 지정된 장소에 놔두면 예약이 완료된다. 동키서비스의 가장 큰 장점은 몸이 편해진다는 것이겠지만 사실 내겐 원하든 원치 않든 목적지까지 가야하는 강제성이 생긴다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의지박약인 내게 딱 맞는 것 같다.


3.jpg 깜깜한 새벽, 우테르가(Uterga)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우테르가(Uterga). 가로등 빛만 겨우 깜박이는 시간에 알베르게를 나왔다. 개 짖는 소리 외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가 본다. 오늘은 어제보다 아픈 게 좀 덜한 느낌이다. 잠들기 전, 한때 운동을 오래했던 친구에게 카톡으로 증상을 설명했더니 통증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알려준다. 친구는 내 무릎이 인대쪽 부상이 아니라 근육이 놀라서 힘줄이 딱딱해진 것 같다고 했다. 보호대나 찜질팩이 따로 없었기에 일단 급한대로 코반으로 무릎을 감싸고 수건으로 바지 위를 덧대어 압박을 시켰다. 하얀 수건이 붕대를 연상케 했다.


날씨는 흐렸지만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어제 수많은 생각과 고생을 했던 탓일까. 그만큼 깊은 바닥을 찍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침을 먹어야하는데 문이 열린 식당이 없어 자판기에서 대충 아무거나 사 먹었다. 맛이 없었다. 계속 걸어간다. 뭔가 의미 있어 보이는 성당이 나왔다. 어떤 곳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한 번은 길을 걷다 마주한 갈림길에서 표식이 없어 당황했는데, 화살표가 인쇄된 A4용지가 바닥에 놓여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글이 적혀있다. 타지에서 만난 익숙한 언어가 길을 알려준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화살표가 나왔고, 7km를 단숨에 걸었다. 오랜만에 동키서비스를 이용해서인지 너무 가볍고 신이 나서 빠르게 걸었던 것 같다.


4.jpg




어느새 중간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 도착했다. ‘여왕의 다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푸엔테 라 레이나는 상징적인 마을이라 그런지 많은 순례자들이 다녀가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마을들에 비해 규모가 커서 카페와 약국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마을을 지날 무렵 간식을 먹기 위해 카페에 들렸다. 콜라와 또르띠야를 먹고 물집에 붙일 콤피드를 사러 약국(Farmacia)에 갔다. 무릎보호대와 등산스틱없이 걸은 저질체력의 최후는 물집과 반창고였다.


오늘의 최종목적지인 에스떼야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기에 서둘러 걸어갔다. 걸으면서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은, 우리는 꼭 페레그리나(순례자)가 아니라 파이오니어(개척자)같다는 것이었다. 좁은 길에 뭔 수풀이 이렇게 많은지 장갑이랑 긴 바지가 아니었으면 피부가 다 긁힐 뻔 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포도밭을 지나 마을처럼 생긴 곳에 도착했다. 이름도 모르는 이 마을에서, 수비리에서 만났던 미국인 루비와 루비 아빠인 메이슨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절뚝거리는 나를 보고 무슨 일이냐고 걱정해줬다. Everything is okay? 가 그렇게 고마운 말인 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루비와 메이슨은 약간의 휴식과 촉박한 일정 탓에 오늘은 여기까지 걷고, 내일은 버스를 타고 로그로뇨로 점프할 거라고 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그들은 떠났다.


마을이 예뻐서 발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걸었는데, 길이 복잡하고 화살표도 드물게 있어서 생각보다 많이 헤매게 되었다. 동영상을 찍으며 터덜터덜 걷는 내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소리를 친다. 'HEY!! Peregrina!! HEY!!!!' 돌아보니 어떤 할머니가 내 쪽으로 계속 손짓을 하며 Peregrina(순례자)!!라고 외치고 계셨다. 그 뒤에 하신 말은 '거기 길 아니야! 저쪽이야!!'였다.




화살표가 그려진 표지석을 지나고, 커다란 트랙터 옆을 지났다. 순례길을 걷다 별이 된 누군가의 무덤을 지나고 성당도 지났다. 국도를 따라 걷다 보니 슬슬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들어갔다. 스페인하면 빠에야라고 생각해서 빠에야를 주문했지만 맛이 없었다. 왜 맛이 없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인스턴트 냉동빠에야였다.)


밥을 먹고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까 만났던 미국인 루비와 메이슨을 여기서 또 보게 되었다. 위스콘신에서도 이렇게 더운 적은 없었는데 여기 날씨는 정말 미친 것 같다며 빨갛게 익은 얼굴과 팔을 보여준다. (빠에야 맛있냐는 질문에 다른 걸 시키라고 소곤소곤 말해줬다.) 그들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떠날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오후 3시의 스페인은 43도의 태양이 5시간째 내리쬐고 있었다. 루비가 이 날씨에 나가는 거 진심이냐고 재차 묻는다. 나도 안 나가고 싶다 정말. 하지만 내 가방이 목적지에 가있어서 가야한다고 했다. 가방을 미리 보내놓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여기서 하루를 마무리했을 것 같다. 아침에는 분명 원하든 원치 않든 목적지에 가야하기 때문에 동키서비스가 좋다고 했는데, 가방을 보낸 게 잘한 선택인지 갑자기 회의감이 든다.


15-1.jpg
15.jpg
눈에 띄게 짧아진 그림자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에스떼야(Estella)로 다시 출발했다. 지나가는 달팽이를 주워서 풀숲으로 돌려보내주었다. 짧아진 해를 뒤로하고 엄청난 높이의 나무를 지나 열심히 걷다보니 말이 보인다. 또 다시 작은 마을이 나왔다. 이때쯤 되니까 마을 이름이 궁금하지도 않다. 마을을 나와 숲길을 걷는다. 숲 속에 작은 물줄기가 이어지고 있다. 스페인이라고 다 맑은 물은 아닌 것 같다. 한참을 걸었는데 이전마을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마을이 나왔다. 더운 날씨였지만 생각보다 가볍게 온 것 같다. 덥고 힘든 게 당연한 것 같아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려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있었다.



14.jpg 하늘에 닿을 듯한 나무




에스떼야(Estella)에 도착했다. 여기는 뭔가 도시 같다. 이곳에 데카트론(스포츠 용품 파는 곳)이 있다고 하던데 등산스틱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지도를 켜서 데카트론 위치를 확인하고 그 근처에 있는 알베르게로 갔는데, 첫째 날 피레네산맥에서 봤던 기선씨가 도착해 있었다. 저녁을 같이 먹기로 약속하고 배정받은 침대에 짐을 풀었다.


16.jpg 건물이 높고 자동차가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 기선씨와 함께 데카트론에 갔다. 등산스틱을 한 개 살까, 두 개 살까 고민하던 내게, 기선씨는 등산스틱은 양쪽이 있어야 한다며 두 개를 사라고 조언해주었다. 그 말에 나는 다리 두 개가 더 생기게 되었다. 이제 네 다리로 훨씬 더 수월하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데카트론에서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식당에 들렀다. 샹그리아와 샌드위치, 크로켓을 주문했다. 점심 때 먹은 빠에야보다는 맛있었다. 저녁을 먹고 알베르게로 다시 돌아와 널어놓은 빨래를 찾아 개어놓은 뒤 잘 준비를 했다. 오늘은 정말이지 걷기만 했다. 5시에 출발해서 오후 5시까지. 하루종일 얼마나 걸었나 싶어 예전에 핸드폰에 설치해 둔 어플을 꺼내 자동으로 체크 되는 걸음 수를 확인해 보았다. 55,000걸음.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렇게 긴 시간과 거리를 걸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냥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었다. 내일은 또 얼마나 걷게 될까.




(사족1)

어제보다는 훨씬 가벼운 몸과 마음이었는데 이상하게 길을 자꾸 잃었다. 한 곡을 하루 종일 듣는 나는 와이파이가 될 때 재빨리 음악을 받아놓았다. 걸으면서 앞뒤로 아무도 없다는 게 확인이 될 때면 열심히 따라 부르면서 걸었다. 아이유-분홍신의 첫 마디는 ‘길을 잃었다.’ 이다.




(사족2)

스페인에 오기 한 달 전 지운 포켓몬고를 다시 꺼냈다. 유럽에만 나온다는 마임맨을 잡기 위해. 내 포켓몬 도감에 있는 그를 보니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