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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송이타파스 Aug 30. 2020

05. 해외직구 운동화

그러게, 정말. 그 운동화가 뭐라고.


 2004년, 나는 말썽도 많고 탈도 많았던 중학교 2학년이었다. 중2병으로도 유명한 그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나의 중학교 2학년은 모든 게 처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친구들, 당장이라도 결혼할 것 같았던 첫사랑, 처음 배우는 지식들과 처음 깨닫는 나의 한계 등. 2004년의 여중생이었던 나는 아침에는 늦잠으로 가끔 지각도 했고, 불량식품을 학교에 들고 와서 먹다가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다. 방과 후에는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에 등록해 교우관계를 이어갔고, 어떤 선생님을 몰래 좋아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의 성적차가 커 선생님이 걱정하던,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나는 여느 중학생들과 같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나를 꾸미는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 학생이 꾸며봤자 얼마나 꾸미겠는가. 그때는 요즘처럼 유튜브나 SNS로 '자연스러운 중2 화장법', '티 안 나게 화장하는 법' 같은 게 공유되지도 않았고, 학생을 위한 화장품이 많지도 않았다. 머리 모양이나 피부색이 조금만 달라져도 교무실로 불려 가거나 교내 청소를 해야 했던 2004년의 중학생에게 허용된 꾸밈은 결국 알록달록한 가방이나 운동화가 전부였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브랜드의 가방이나 운동화는 이미 모든 아이들이 가지고 다녔다. 유행에 둔감했던 나는 많은 사람들이 특정 브랜드의 가방이나 운동화를 들기 시작하면 그제야 내 눈에 그 브랜드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그 브랜드의 제품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용돈을 모으고 나면 그때는 이미 그 브랜드의 유행이 지나 더 이상 예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운동화를 사기 위해 여기저기서 정보를 모으던 중 우연히 해외에서만 출시되었던 아디다스 스탠스미스 제품을 알게 되었다. 이 하얀색 운동화는 찍찍이라고 불렸던 분홍색 벨크로 테이프 세 개가 운동화 위에 붙어있었고, 앞코 모양도 동그랗게 되어있어 정말 귀여움 그 자체였다. 이거다 싶어 한참을 인터넷에서 찾아봤지만 이 운동화를 파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중고거래 글조차 올라오지 않아 애간장이 타던 중, 해외에서 구매해서 내게 전달해주겠다는 판매자를 발견했다. 해외직구라는 개념이 뭔지도 몰랐을 무렵이라 혹시 사기를 당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었지만, 10만 원가량하던 이 비싸고 예쁜 운동화를 꼭 갖겠다는 일념이 더 앞섰었다. 시간은 꽤 걸렸지만 다행히 운동화는 내 품에 들어왔고 혹시나 이 하얀 운동화에 때가 탈까, 체육시간이 있던 날은 더러워져도 되는 헌 운동화를 신으면서까지 애지중지했었다. 이 운동화를 신은 날 밤이면 어김없이 가죽 클리너와 융 수건을 꺼내 앞코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관리를 해 온 덕분에, 내 운동화는 항상 새것처럼 신을 수 있었다.




 그렇게 3주가 지났다. 여전히 반짝반짝한 내 운동화는 신발장에서도 신문지 위에 예쁘게 올려져 있었다. 가족들은 다들 유난이라고 했지만 내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다른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갔다 온 날 내 운동화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잘 있었던 운동화가 오후가 되니 갑자기 없어진 것이었다. 운동화에 발이 달렸을 리도 없는데 누가 신고 나간 건 아닌지 가족들의 발 사이즈를 다 떠올려봐도 도무지 답이 없었다. 혹시 어제 내가 가죽 클리너로 운동화를 닦고 난 다음 방 안에 두었나 싶어 방에도 들어가 봤는데 내 운동화는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이 황당한 사건에 어쩔 줄 몰라하던 차에 과일을 사러 갔던 할머니가 집에 돌아오셨다. 할머니한테 혹시 내 운동화를 본 적이 없는지 물어보니 할머니는 아침에 빨아서 베란다에 널어 두었다고 하셨다. 설마설마하는 불길한 마음을 안고 베란다로 가 보니 물에 잔뜩 젖어있는 내 운동화가 빨랫대 한쪽 구석에서 햇빛을 받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운동화를 살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앞코가 닳아 있었다. 조금 닳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앞코의 가죽이 다 일어난 상태였고 거칠거칠한 촉감과 함께 흰색이 회색으로 변해버렸다. 이전의 반짝반짝하던 앞코는 사라지고 사포마냥 까끌까끌해진 처참한 모습만 남아있었다. 요즘처럼 운동화 세탁을 전문으로 해 주는 곳이 있을 리 만무했던 2004년의 운동화 세탁은 집에서 청소솔로 운동화 곳곳을 닦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억센 청소솔로 운동화 구석구석을 솔질하고 물에 세제를 풀어 세탁하고 몇 번 헹구고 나면 새 것처럼 깨끗해지곤 했다. 내가 매일 방에서 가죽 클리너로 운동화를 관리해왔던 걸 몰랐던 할머니는 다른 운동화를 빠는 김에 같이 빨아버려야겠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오열하며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얼마나 아끼던 운동환데. 이 운동화를 사기 위해 몇 달 전부터 검색하고, 또 몇 달을 돈을 모으고, 구매하고서도 몇 주를 기다려 내게 왔었는데. 매일 밤마다 유난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관리했던 소중한 운동환데. 운동화를 위해 보낸 시간들이 한 번의 솔질로 다 헛되이 된 것 같았다. 3주 동안 친구들에게 처음 신는 흰 신발은 밟아줘야 오래 신는다는 소리를 듣고도 애써 도망치며 절대 못 밟게 했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한 번 밟으라 했었어야 했나. 그동안 내가 관리해 온 노력이 이렇게 물거품이 되다니. 이런 영문을 알 리 없던 할머니는 그게 그렇게 비싼 운동화냐며 다시 사주겠다고 나를 달래주었지만 그 오랜 시간을 다시 기다릴 수도 없을뿐더러, 다시 기다려 새 운동화를 받게 된다 하더라도 지금 떠나보낸 이 아이와 같을 것 같지 않았다. 바짝 말리면 괜찮을 거라고 선풍기 앞에서 운동화를 말리는 할머니에게 나는 다시 한번 소리를 크게 지르고는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녁도 안 먹고 엉엉 울고 있는 내게 엄마가 운동화 값을 줄 테니 마음 풀고 나와서 밥 먹으라고 하셨지만, 이미 떠난 운동화인데 운동화 값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저녁도 안 먹고 돈도 안 받고 그렇게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학교에 가려고 나와보니 신발장 한가운데에 내 운동화가 놓여있었다. 할머니가 밤새 운동화를 말리기 위해 신문지를 몇 번이고 넣었다가 뺐다 한 흔적도 같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상한 가죽이 돌아올리는 없었고, 하얗고 예뻤던 내 운동화는 여기저기 가죽이 일어난 채 얼룩덜룩한 모양으로 초라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화낼 힘도, 울 힘도 없었던 나는 다른 신발을 신고 터벅터벅 학교를 갈 수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신발을 어떻게든 복구해보려고 구두약과 하얀 가죽 염색약을 사서 신발에 발라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일어난 가죽만 더 지저분해 보일 뿐이었다. 하얀색 아크릴 물감으로 전체를 칠해버리면 나을까, 페인트를 부어 버릴까, 아니면 아예 전체를 솔질해서 갈색 빈티지 운동화처럼 신고 다닐까. 마지막 남아있던 작은 희망의 불씨까지 떠올려보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었고, 몇 달 간의 사투를 벌였던 내 운동화는 그렇게 종량제 봉투 안에 담기게 되었다.


 성인이 된 나는 더 이상 그때만큼 운동화 욕심이 있지는 않다. 혹여나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찾더라도 디자인보다 얼마나 편한지에 초점을 더 맞추게 되었고, 비싼 운동화를 사서 신더라도 가죽이 조금 상하는 거엔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 그때 그 운동화는 당시와 비슷한 가격으로 아직 판매되고 있다. 시간이 지나 같은 운동화는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지만 할머니에게 소리를 쳤던 그때의 나는 돌이킬 수가 없다. 밤새 운동화를 말리려 밖에서 신문지를 얻어 와 몇 번이고 선풍기 앞에서 신문지를 신발에 넣었다 뺐다 한 할머니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나는 할머니에게 그런 모진 말들을 하지 않았을텐데. 다음 날 내 책상에 소중히 놓여있던 봉투 안에는 할머니가 넣어 둔 5만 원이 있었다. 손녀딸이 비싼 운동화라고 했으니 이 정도 가격쯤 하겠지 하며 한 푼 두 푼 넣어 둔 돈임에 분명했다. 고작 운동화 하나에 저렇게 성질 낼 일인지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셨음에도 밤새 운동화를 말리면서 복구가 안 되는 걸 보며 미안한 마음에 용돈 봉투를 놓고 가셨을 것이다. 그러게, 정말. 그 운동화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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