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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송이타파스 Aug 23. 2020

04. 너는 작은 외삼촌과 그렇게 닮았다.

어휴 사촌오빠도 그렇게 좋아하셨지

'얘는 정원이 어릴 적이랑 똑 닮았어, 애가 어찌나 똑똑한지.'


  할머니의 작은 외삼촌 사랑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작은 외삼촌은 학교를 다닐 때 단 한 번도 할머니가 아침에 깨워준 적이 없었으며, 항상 알아서 밥도 잘 챙겨 먹었고, 이부자리도 잘 정리했다고 한다. 2남 1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외삼촌은 형, 누나뿐만 아니라 교우관계도 좋았다. 학교에서는 누군가와 사소한 다툼조차 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할머니를 부르길래 무슨 큰일이 났나 해서 가보니 성적이 너무 좋아 서울로 대학을 보냈으면 한다는 이야기였었다고.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작은 외삼촌은 사춘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바르게 자랐고, 재수를 했지만 결국 서울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수재였다. 어릴 적부터 똑똑함이 남달랐던 외삼촌이 그 유명한 서울대를 그것도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은 할머니에게 큰 자랑이었다. 작은 외삼촌은 할머니의 자식 자랑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소재였고, 할머니의 자랑을 넘어 이젠 작은 외삼촌의 누나인 우리 엄마까지 둘째 동생을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나와 언니가 속을 썩일 때면 엄마는 항상 '나는 어릴 때 우리 엄마 고생시킨 적도 없고 내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정원이는~'으로 시작하며 연설을 이어가셨다. 어릴 때부터 거의 세뇌 수준으로 들어온 정원이 외삼촌의 천재적인 면모들은 우리 자매에게 강하게 각인되었고, 세상에 모범이라는 단어가 의인화된다면 바로 우리 외삼촌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나를 보고 외삼촌 어릴 적과 똑 닮았다고 할 때마다 나는 넘쳐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려 입꼬리를 내리곤 했다. 내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과 견줄 정도로 똑똑하단 말인가. 사실 나는 천재가 아닐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어릴 때는 똑똑했다고 한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구구단도 잘 외우고 여러 상황에서 재치 있는 답을 했다고. 어릴 때는 그랬다고 한다. 어릴 때는..




  할머니는 작은 외삼촌만 사랑하신 게 아니었다. 할머니가 모든 자식들을 사랑하셨지만 그중에 으뜸은 역시 작은 외삼촌이었다. 그다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아니 할머니가 사랑을 많이 표현했던 대상은 사촌오빠였다. 할머니에게 큰 아들의 아들인 사촌오빠는 작은 외삼촌 다음으로 가장 아끼는 가족이었다. 그도 그럴 듯이 말썽만 부리는 외손녀들에 비해 사촌오빠는 성실 그 자체였다. 내 기억 속에 사촌오빠는 명절에 친척들이 다 모이는 자리에서도 잠깐 인사를 하고 방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사촌동생은 사촌오빠가 일부러 저러는 거라며 투덜댔지만 내 눈에는 그런 모습의 사촌오빠라도 대단해 보였다. 이런 사촌오빠가 마음을 쏙 빼앗은 사람은 할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엄마 역시 성실하고 똑똑한 사촌오빠를 아꼈고, 나는 명절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사촌오빠의 훌륭함을 라디오마냥 듣곤 했다. 이로써 우리 집엔 나라를 일으킬만한 똑똑이들이 둘이나 있게 되었다.




  명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종종 모이곤 했다. 할머니의 생신이라는 이유로, 사촌오빠가 대학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우리 언니가 취업했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 삼아 할머니 댁에서 모임을 가졌다. 큰 외삼촌과 큰외숙모가 오실 때면 할머니가 음식을 준비하며 고생하실까 봐 외숙모가 직접 반찬을 해 오셨다. 할머니는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지만 아들과 며느리가 절대 음식 준비를 하지 마시라 하는 바람에 식사를 같이 하는 것으로 만족하곤 하셨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에게도 예외는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작은 외삼촌과 사촌오빠가 올 때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들의 음식취향을 익히 들어왔다. 작은 외삼촌은 곰국을 좋아하고 사촌오빠는 갈비를 좋아했다. 진정으로 그들이 좋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알고 계셨다. 작은 외삼촌이나 사촌오빠가 집에 온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일주일 전부터 엄마 핸드폰에 불이 나고 있었다.


'정원이가 일요일날 온다는데 시장에 가서 소 뼈 좀 사 오고, 갈치도 사와래이. 아 요즘 야가 기운이 없어 비드라. 닭도 좀 푹 고아야겠다. 닭 그거 잘 보고 사와래이'


  무릎이 안 좋은 할머니 대신 모든 음식 재료를 사다 나르는 건 우리 엄마였고, 요리를 하는 것도 결국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둘째 아들 좀 그만 챙기라며 내가 골병들겠다고 하셨지만 할머니는 꿋꿋하게 음식을 준비하셨다. 작은 외삼촌이 할머니 댁에 오는 날은 집 전체가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음식 재료 준비로 힘들었던 엄마의 투덜거림과 할머니의 생색이 오가는 식사 자리에서 외삼촌은 대화 주제를 돌리기 위해 '요즘 승은이는 어떻게 지내니?'하며 날 보셨고, 내 재미없는 대답은 뜨거운 곰국의 김이 사라지듯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윽고 상다리에 과일접시가 올라오면서 우리의 수다스러운 저녁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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