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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송이타파스 Aug 16. 2020

03. 할머니는 소금구이를 해주셨지

승은이는 수박 킬러야!

'우리 승은이는 날 닮아서 수박을 좋아하지. 수박 킬러야 수박 킬러~'


  입이 유난히 짧아 매 끼니마다 부모님 속을 썩였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과일은 당연히 수박이었다. 낮에는 매미가 울고 밤에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무더운 여름날이 되면 우리 가족은 선풍기 앞에서 수박을 먹었다. 여름에도 어김없이 이불 장사를 했던 할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마치고 퇴근할 때 꼭 수박을 사서 우리 집에 들르곤 하셨다. 네 식구가 생활하는 집에서 과일이란 건 마치 신기루 같은 것이어서, 깎아놓고 한 입 베어 물고 나면 접시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인지 우리 집 식구들은 수박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조금이라도 딱딱하거나 신 과일을 싫어하는 언니는 엄마가 수박이 찍힌 포크를 쥐어줄 때면 한 두 조각을 겨우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달달하고 맛있기만 한 이 수박을 왜 싫어하는지 도통 이해할 순 없었지만 가끔 씹히는 수박씨나 초록색 껍질 부근의 하얀 부분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과일 세계에서 언니라는 적수는 자발적으로 퇴장을 했고, 나는 수박에서만큼은 천천히 맛보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피자 모양으로 깎아 놓은 수박은 가끔 까만 씨가 씹혀 눈을 찡그리게 했지만, 수박에는 그걸 이길 만큼의 달달하고 시원한 맛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문 손잡이 소리에 예민해질 때가 있다. 이제 집에 누군가 집에 올 시간이 됐는데, 할머니가 올 시간인데. 더운 여름날 선풍기 앞에서 '아~~' 하는 목소리가 선풍기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이면 할머니가 한 손에 수박을 들고 오시는 소리가 분명했다. 현관까지 할머니를 마중 나가 할머니 손에 든 수박을 들고 와 식탁에 내려놓았다. 거실 의자에 앉아 할머니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으면 할머니는 부엌으로 가 금세 뚝딱하며 수박을 반으로 갈라주셨다. 쩌어억 소리와 함께 갈라지는 수박 결에서 하얀색 설탕가루 같은 게 보일 때면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할머니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숭덩숭덩 수박을 썰어 큰 쟁반에 담아주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할머니와의 수박 티타임은 나와 할머니 단 둘만의 추억이리라. 할머니가 주는 모든 수박을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먹고 나면 할머니는 날 보고 항상 수박 킬러라 하셨다. 승은이는 날 닮아 수박 킬러라며.




  수박만큼이나 할머니와 자주 먹던 음식은 소금구이였다. 언니와는 다르게 편식이 심했던 나는 고기만큼은 호불호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소금구이는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프라이팬에 지글지글 구워 소금을 팍팍 친 것이었다. 상추 몇 장과 밥 한 그릇, 쌈장, 그리고 소금을 넣은 참기름장이면 우리 둘만의 저녁상이 완성되었다. 엄마는 오늘도 고기를 먹었냐며 음식은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매번 잔소리를 했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추에 밥을 깔고 소금간이 된 고기를 기름장에 찍어 한 입에 넣으면 밥이 술술 잘 넘어갔다. 평소라면 밥 반 그릇도 겨우 먹거나 남겼던 나인데 할머니의 소금구이만큼은 그 짭짤한 맛에 밥을 더 찾게 되었다. 프라이팬에서 굽혀지고 있던 고기 위에 뿌린 하얀 가루가 사실은 소금이 아니라 마법가루 같은 게 아니었을까. 무슨 이유였는지 엄마에게 혼이 나 엉엉 울고 난 다음날이면 할머니는 소금구이를 해 주셨고, 같이 등하교를 하던 학교 친구도 가끔 불러 할머니와 셋이서 소금구이를 먹곤 했다. 어쩌면 할머니에게 소금구이란, 편식하고 투정하는 외손녀를 달래는 수단이자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던 외손녀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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