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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송이타파스 Aug 09. 2020

02. 배드민턴 함 치러 가자

할머니는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거의 매일 나와 배드민턴을 쳤다.

  1990년대 후반, 역사적인 부흥을 이루어냈던 한국은 거짓말같이 IMF 위기를 맞게 되었다. 우리 집에 여파가 미쳤던 건 1999년 즈음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설렜던 나는 우리가 이사를 가야 한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엄마가 전후 사정을 설명해주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9살의 나는, 당장 어제의 단짝과 헤어져야 한단 생각에 속상할 뿐이었다. 이사 갈 집이 확정되던 날 친한 친구와 이별인사를 했고 며칠 뒤 이삿짐 트럭 조수석에 엄마와 같이 앉아 생전 처음 보는 동네로 이사를 갔다.


  주택이 아닌 아파트 생활은 특이하고 재밌었다. 천둥번개가 치던 날엔 주택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꼭 괴물의 울음소리 같았다. 창밖에는 번쩍번쩍하는 번개 빛이 이어졌고 창문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흔들리곤 했다. 부모님이 안 계시던 한낮에 천둥번개가 칠 때면 언니는 무서움에 떨곤 했다. 우리 둘만 이 세상에 있는 기분이었다. 언니는 내가 영 못 미더웠는지 방 안에 숨어 엄마를 기다렸다. 나는 그런 언니를 놀릴지 위로를 해 줄지 매 순간 갈등했던 개구쟁이였다. 나는 혼자 거실로 나가 이 기이한 자연현상에 감탄하곤 했다. 아파트에서는 천둥번개가 쳐도 창문이 크게 흔들리거나 괴물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지 않았다. 언니는 여전히 천둥번개를 무서워했지만 이전만큼은 아니었다. 옆집과 윗집, 아랫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택에서는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까만 대문을 열쇠로 열고 마당을 걸어 가 벽돌집의 문을 또 열쇠로 열어야 했다. 밖에 나갈 때는 문을 꼭 잠가야 했고 밤에 잘 때는 창문을 닫지 않으면 도둑이 들 것 같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곤 했다. 아파트에서는 수많은 자동차가 있는 주차장을 지나 경비아저씨와 인사를 하고 자동으로 열리는 공동현관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모르는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은 층으로 이동해서는 우리 집 호수를 또다시 찾아야 했다.




  그 시기의 나는 무언가를 잘 잃어버렸다. 특히 집 열쇠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열쇠가 없을 때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주택이나 아파트나 똑같았다. 주택에서는 친구 집 골목에 가서 '00아 노올자~'하면 친구가 나왔다. 해 지기 전까지 집 앞 골목길에서 친구와 놀다 저녁 먹을 때쯤 집에 들어가기 일쑤였던 반면, 아파트에서는 열쇠를 잃어버리면 사람이 없는 계단에 쪼그려 앉아 더위와 추위에 떨곤 했다.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면 흠칫 놀라면서 아래층이나 위층으로 도망갔다. 누군가가 내가 열쇠가 없이 이 곳에 앉아있는 걸 알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2, 3시간 넘게 가족이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엄마는 나를 보면 열쇠를 또 잃어버렸냐며 혼낼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빨리 돌아와서 나를 구원해주길 바랬다. 12시에 학교에서 돌아와 3시간 정도를 기다리다 보면, 제일 먼저 돌아오는 건 언제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거의 매일을 우리 집으로 출퇴근하셨다. 맞벌이하셨던 부모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봐준 어른은 할머니가 유일했다. 왜 여기 쪼그려 앉아있냐고 배 고프지 않냐며 나를 데리고 집 앞으로 가 열쇠로 문을 여는 할머니의 모습은 구원자 그 자체였다. 오후 3시쯤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할머니의 하루와 나의 초등학교 친구들 이야기를 하고 나면 할머니가 늘 하셨던 말씀이 있다. '배드민턴 함 치러 안 갈래? 준비해라.'


  아파트 뒤편에 나 있는 넓은 산책로는 사실상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는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음지여서 그런지 가끔 우악스러운 남자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할 때 외에는 잘 이용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소소한 운동 겸 외손녀와 놀아주기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배드민턴을 잘 쳤다. 셔틀콕이 할머니에게 왔다가 가면 길고 꾸준한 포물선을 그리며 내 배드민턴 채 앞에 와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배드민턴을 잘 못 쳐서 매번 땅에 떨어진 셔틀콕을 주으러 다니기만 했다. 어쩌다 5~6번 정도 랠리가 이어질 때면 할머니는 연신 '그렇지! 그렇지! 잘한다!' 하며 나를 북돋아 주셨다. 멀리 떨어지는 셔틀콕을 줍다 지쳐 투덜거릴 때면 저기 가서 쉬고 있으라며, 할머니는 다른 배드민턴 상대를 구해오셨다. 보통 내 또래의 아이거나 조금 더 큰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정도였는데 할머니에게 어떻게 그렇게 배드민턴을 잘 치시냐며 배움을 청하곤 했다. 그걸 보는 나는 내심 질투도 나면서 왜 이렇게 나는 운동신경이 없는지 약간의 자책도 했다. 근처 벤치에 앉아 이 나무, 저 나무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구경하고 벽에 붙어있는 달팽이를 손 위에 올려놓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둑어둑해질 때가 되면 할머니는 땀을 흘려서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이제 집에 드가자!'하며 씩 웃으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갔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할머니의 무릎이 안 좋아졌다. 앉았다 일어나실 때 약간은 절뚝이는 무릎으로 신음을 내뱉으셨지만, 하교 후 나와 배드민턴 시합을 하시는 건 잊지 않으셨다. 이렇게라도 운동을 해야 한다며 기어코 귀찮다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셨다. 언니도, 엄마도, 아빠도 없이 집 안에 혼자 있을 내가 걱정돼서 였을까. 읽은 책을 또 읽고, 또 읽으면서 더이상 읽을 게 없어 멍한 눈으로 TV를 보던 내가 안타까워서였을까. 할머니 나름의 외손녀와의 대화를 위한 노력이었을까. 할머니는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거의 매일 나와 배드민턴을 쳤다. 내가 같은 반 친구들과 학원에 다니면서 오후 시간을 보내기 시작할 무렵, 할머니와의 배드민턴은 주 1,2회로 줄어들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빈도가 줄어들어 나중엔 월 1회 정도가 되었다. 지금 와서 다행인 것은, 그마저도 귀찮다는 핑계로 외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 역시 할머니와의 배드민턴이 좋았고 더운 여름날 그늘에서 땀 흘리며 셔틀콕을 주으러 다녔던 게 그리 싫진 않았던 모양이다. 아, 물론 지금도 배드민턴은 여전히 못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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