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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송이타파스 Aug 02. 2020

01. 이불집 어린 외손녀의 고된 하루

1990년대 초 서문시장

 키가 큰 목련나무가 하늘높이 뻗어있었던 어느 한 주택, 나는 그 곳에서 태어났다. 아침마다 참새 수십마리가 하얀 목련꽃이 핀 나무에 날아들어 매일 새소리에 잠을 깼고, 마당에는 까만 강아지가 집을 지키는 어느 주택의 평온한 하루였다. 나는 그 집의 주인인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둘째 딸이요, 집에서 가장 어른인 외할머니의 외손녀였다. 내가 태어나던 날인 2월 26일은 공교롭게도 둘째 외삼촌의 대학 졸업날이었고, 엄마의 진통이 시작되면서 할머니는 둘째 외삼촌 대신 나를, 아니 정확히는 엄마의 손을 잡아주셨다. 그 이후 둘째 외삼촌은 명절 때마다 그 때 자신의 엄마에게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냐며 우스개소리를 하셨다.


 할머니는 대구에서 가장 큰 시장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하셨다. 가정집에 필수였던 이불을 몇 십 년간 팔아오셨다. 단골손님이 다른 손님을 소개해주고, 그 손님이 또 다른 손님을 소개해줘서 많이들 찾아오는 가게였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는 나를 매일 시장에 데리고 가서 이불가게 한 켠에 자리를 만들어 주셨다. 장난감을 가지고 잠자코 놀고 있으면 옆 집 천 가게 아주머니, 건너편 솜 트는 집의 할머니, 실타래를 파는 할아버지들이 '아이고 이 집 외손녀는 오늘도 왔네'하며 나를 예뻐해주셨다. 가끔 작은 카트에 커피, 코코아, 주스따위를 담아 시장 곳곳을 다니며 음료를 팔던 아주머니는 날 볼 때마다 '애기야 코코아먹을래? 아줌마가 코코아 타 줄까?'하며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부었다. 사실 코코아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른이 주는 건 되도록 감사합니다를 덧붙이며 받아왔던 나는 오늘도 반사적으로 감사합니다를 외쳤고, 그걸 잠자코 지켜보시던 할머니는 '새댁이 장사를 참 잘 하네. 근데 우리 애는 애 엄마가 그런 거 못 먹게 해. 오늘 까지만 먹을게~'하며 매일 잔돈을 쥐어주고는 웃으며 새댁을 떠나보내셨다. 내 기억 속의 시장은 그런 곳이었다.


 할머니는 가게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바닥을 쓸었다. 주변이 깨끗해야 손님도 좋은 기운을 안고 갈 수 있다며 매일 쓸고 닦았다. 가게 주변과 좌판 바닥을 다 쓸고 나면 할머니는 내게 이제 올라가도 된다는 신호를 주었다. 노란 장판이 깔린 가게 바닥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했다. 내 키에는 꽤 높은 좌판이었기에 옆에 있는 돌 계단을 세 칸이나 올라가서야 좌판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할머니를 지켜보는 건 내 소중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종과 같았다. 할머니는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오셨고 장부를 정리했다. 그리고는 가게 가장자리에 놓인 하얗고 포근해 보이는 이불들에 혹시나 먼지가 붙었을까 먼지털이로 탈탈 털곤 했다. 다른 가게 사장님들이 하나, 둘 출근하며 할머니에게 가볍게 인사할 때쯤 오늘의 장사 준비가 끝이 났다.


 이른 아침부터 손님들이 올 리 만무했다. '저 짝 빼닫이에서 과일칼 좀 가온나'. 우리 엄마라면 어린 애가 칼 같은 위험한 물건은 절대 만지면 안 된다며 기겁했을 일이었지만 이미 세 명의 자녀를 어려움 속에 장성시킨 할머니에겐 칼 따위는 별로 위험한 물건이 아니었다. 한 쪽 구석에 있는 서랍 앞에 앉아 위에서 두 번째 손잡이를 당기면 노란색 과일 칼이 나왔다. 할머니에게 배운 대로 칼 끝을 내 쪽으로 향하게 잡고 손잡이가 할머니 쪽을 보게 한 채로 칼을 건네 주었다. 가죽이 헤져 회색빛이 보이던 작은 가방에서 비닐에 담긴 과일이 하나, 둘 나왔다. 오늘은 사과인가 보다.


 사과를 먹으며 할머니랑 이야기를 했다. 정말 아무 이슈없는 일상의 이야기였다. 어제는 비가 와서 무릎이 쑤신다는 둥, 이가 빠진 컵은 쓰면 안 된다는 둥, 어제 저녁은 누구랑 놀았냐는 둥 오늘도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만을 했다. 할머니는 많은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라디오같았으며, 가끔은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와 감정의 이야기도 하셨다. 나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할머니가 내 생각을 물어보실 때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고민을 한 답을 내놓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크게 웃으며 '애가 영특하네 영특해' 하며 다른 이야기를 또 해 주셨다. 칭찬을 받고 신이 났던 나는 또 어떤 아이디어와 대답으로 할머니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지 인생 최대의 고민을 했고, 할머니는 그 때마다 너는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너네 둘째 외삼촌이랑 참 닮았다며 칭찬해주셨다.


 때로는 이불을 사러 온 손님이 나를 보고 손녀딸이냐며 내 이름과 나이를 물어보시곤 했다. 관심받는 게 좋았던 나는 베시시 웃으며 쪼르르 달려가, 손님에게 직접 내 이름과 나이를 직접 말했다. 어떤 손님은 내게 어떤 이불이 더 좋은 이불이냐며 내가 고르는 이불을 사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 때에도 인생 최대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한 번도 팔아보지 못 한 비싼 이불을 고르면 우리 가게에 많은 돈이 들어오겠지만 이 손님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었다. 뒤를 돌아 할머니 눈치를 봤지만 할머니는 아무 거나 골라보라며 그저 웃기만 하셨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제일 비싼 이불보다는 조금 더 저렴한 이불을 골랐고 '이건 너무 비싸면 이것도 좋아요!'하며 다른 이불을 선택지에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할머니와 손님은 그런 나를 보고 호탕하게 웃었고, 손님은 '이건 너무 비싼데~ 좀 깎아주면 안 돼?' 하며 흥정을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할머니에게 달려가 귓속말로 '할머니, 저 아저씨가 깎아달라는데 깎아줘도 돼요? 얼마 깎아주면 돼요??' 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웃으며 5천원만 깎아줘 보라고 하셨다. 그럼 나는 또다시 손님에게 달려가 '아저씨, 우리 할머니가 5천원 깎아주래요!' 하고 얘기를 하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후의 일은 할머니의 몫이었고 나는 그저 즐거워하는 아저씨를 보며 뭔가 내 몫의 일을 해낸 듯한 뿌듯함과 성취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할머니의 삶이 녹아있었던 시장터에서 이불집 손녀딸로서 큰 역할을 해냈다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시장에서 이불집 손녀딸의 하루는 이렇게 소소한 일들이 가득했다. 이불집 한 켠에서 자리를 잡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다보면 어느새 잠이 들었다. 퇴근시간이 되어 날 데리러 온 엄마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 집으로 돌아갈 때면,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떠들어대다가 나도 모르게 고된 하루에 지쳐 다시 잠이 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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