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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송이타파스 Sep 06. 2020

06. 할머니는 언제나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교복을 입고 0교시를 위해 눈 비비며 등교버스에 타던 나는 20살이 되었을 때 상상도 하기 싫었던 재수를 하게 되었다. 재수생이라고 뭐 별게 있는가. 재수라고 하면 뭔가 특별한 각오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사실은 단 한 번의 시험에서 내 가치가 증명되지 못했기에 1년 더 준비하는 것. 그뿐이었다. 이미 대학생이 된 친구들이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구두를 신고 대학생활을 누릴 때 나는 그들의 위로와 걱정 속에서 0교시 아닌 0교시를 1년 더 보내야만 했다. 재수정도는 다들 한다고, 별 거 아니라고 말하던 지인들과 가족들의 우려 속에는 재수로 보기 좋게 성공할 내가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지만 아쉽게도 결국 나는 삼수를 했고, 사수까진 도저히 할 수 없었기에 하향 지원을 했다. 나름 지방에서 유명한 국립대라는 것과 학과 1등으로 입학하게 되어 장학금을 받은 것이 그나마 우리 가족에겐 안심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 집 딸 올해 또 공부했다면서요, 아이고 고생이 많다. 남들보다 2년이나 더 공부했으면 정말 좋은 대학 가려나 보다! 어디 목표로 하고 있어요? 서울대?' 라는 대화를 어떻게 풀어가야할 지 고민했던 엄마에게서 말이다.


 2년이라는 지독했던 시간을 보내고 입학을 하게 된 나는 합격소식을 할머니께 제일 먼저 알렸다.


'할머니 저 대학가요.'

'아이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어디 가게됐노? 전공은 뭔데?'

'할머니 저 그냥 엄마가 원하는 대로 국립대 가려고요. 학비도 싸대요. 과는 제가 정했어요.'

'부처님 감사합니다 기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외손녀 딸 드디어 대학 갑니다. 감사합니다. 부처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내가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하게 된 건데 왜 우리 할머니는 부처님만 찾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할머니는 매일 우리를 위한 기도를 했고, 특히 가족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나의 삼수와 엄마의 늘어가는 한숨은 할머니께 큰 멍울이 되었었나 보다. 괜히 타지에 가서 고생하고 돈 쓰는 것보다 같은 지역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게 훨씬 낫다는 할머니의 말에, 발바닥의 가시가 빠질 듯 안 빠지는 듯한 애매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모두가 좋아하니 좋은 게 좋은 거겠지 했다.




 대학에서의 내 삶은 2년이 연장된 나의 수험생활을 압축시켜놓은 것처럼 보냈다. 단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남들보다 2년 늦게 입학했으니 2배로 더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다들 대학 대학 하는데 대체 그게 어떤 거길래 하는 생각 반, 보란 듯이 많은 걸 갖고 졸업하겠다는 생각 반이었다. 학과, 동아리, 봉사, 학점, 스펙, 교우관계, 교수님과의 관계, 연애, 여행 등 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대학에서 할 수 있는 건 범죄와 해외연수 외에 모든 걸 해봤다. 당연히 시간이 부족했던 나는 시험기간엔 3시간씩 자면서 모든 일정을 소화해 냈다. 분단위, 초단위로 움직이면서 내 삶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대학에서의 2년이 지났다.


 대학교 3학년 때는 꼭 서울에 가고 싶었다. 타지에서 살아보고 싶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최고라는 대학에 입학한 이들의 모습이 궁금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알고 싶었다. 마침 국립대 간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었었고, 모두가 해외로 떠날 때 나는 서울대에 지원했다. 집에서도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오라며 지원해주었다. 서울에서 살 집과 학적사항 등 모든 준비가 끝났다. 서울로 떠나기 전 날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 나 그때 말했던 거, 서울 가려고요'

'그래 매사에 사람 조심하고, 밥 잘 챙겨 묵고 그래야 한다잉. 니한테 문제 생기면 느그 엄마가 하루 종일 걱정한다.'

'네 알겠어요. 할머니도 건강하시고 식사 잘 챙겨 드셔야 해요'

'거 가면 느그 외삼촌도 한 번 만나봐라 말은 해놨으니 알끼다.'

'근데 사실 걱정도 좀 돼요 저희 집에서 타지생활 해 본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제가 처음이잖아요. 이렇게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가는 게 맞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매사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개안타. 카고 니는 똑똑해서 잘 할 끼다. 기워이나 정워이 외삼촌 봐 봐라. 가들도 혼자 올라갔었는데 잘 살드라. 니도 잘 할 끼다. 가만있어봐라'


 서울에 올라가면 한동안은 집에 내려오지 않을 걸 알고 계셨는지 할머니는 장롱 속에서 봉투를 꺼내 주셨다. 봉투 속에는 만 원짜리 11장과 5천 원짜리 1장, 천 원짜리 2장이 있었다. 할머니는 항상 용돈을 주실 때 이렇게 홀수로, 특히 7이라는 숫자에 맞춰 주셨다.


'아 괜찮아요. 할머니 넣어두세요. 저 알바도 하고 과외도 해서 돈 많아요. 괜찮아요'

'넣어가라 혹시 또 언제 쓰일지 모른다. 안 쓰면 갖고라도 있어라. 그래도 뭔가 있어야 맘이 든든하이까.'


 할머니는 혹시나 엄마가 내 용돈을 가져갈까 우려 속에 몰래 내 가방에 용돈 봉투를 찔러 넣어주셨고, 나는 반강제로 촌지를 받은 사람처럼 약간의 불편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얘기했을 때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들,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들을 할머니에게 얘기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할머니는 우리와 같이 살지 않으셨다. 그렇기에 많은 이야기를 할 정도로 왕래가 잦진 않았지만, 내게 할머니는 무더운 여름날 더위를 가려주는 큰 나무 같은 존재였다. 내 삶에 큰 영향이 있을 법한 일에 나조차 확신이 들지 않을 때면 할머니에게 가볍게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할머니에게 손녀딸 걱정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다.


 장성한 자식들과 손주들을 오래 보아온 노인으로서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으로서도, 당신의 삶을 가꾸어 온 인간으로서도 할머니는 내게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난 그런 할머니를 좋아했고 또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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