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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송이타파스 Sep 20. 2020

08. 할머니의 어린 시절. 고령에서 대구까지(1)

할머니는 처음부터 대구사람이었을까?

할머니는 처음부터 대구사람이었을까?


이 작은 의문은 내게 할머니의 어린 시절 대서사극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생각해보니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들었던 기억이 없다. 부모님의 고향과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은 있어도 할머니가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궁금해했던 적이 없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여름 오후, 여느 날과 같이 우리 집에 오셨던 할머니에게 여쭤보았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냐고.


 할머니는 대구의 남서쪽에 있는 고령군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셨다.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챙기며 집안일을 하느라 손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동생들의 밥을 차려 먹였다. 밭일을 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고 점심시간이 되면 새참 준비를 했다. 점심을 먹고는 설거지나 옷 수선 등의 집안일을 했다. 동생들이 돌아오면 저녁을 챙겨주고 숙제를 도와주곤 했다. 여기저기 구멍이 나 해진 옷을 바느질하고 내일 반찬거리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었다. 할머니의 어렸을 적 유일한 소원은 학교에 가 글을 배우는 것이었다. 집안일과 밭일을 다 해놓고 학교에 가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돌아오는 건 여자애가 무슨 학교냐며 집안일에 더 신경 쓰라는 답변이었다. 동생들 교과서를 밤에 몰래 펴 가며 한글을 배웠지만 턱없이 부족했던 시간에 글쓰기는커녕 글 읽기가 고작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지만 본인의 이름을 쓸 수 있단 게 기뻤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셨다. 마을의 의사를 자처했던 집에 시집을 갔고 그 집의 맏며느리가 되셨다. 할머니의 삶은 시집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에 밥을 차리고 농사일을 하고, 가축들에게 밥을 주고 다시 농사일을 하고. 다만 달라진 것은 친가보다 조금 더 불편한 시댁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던 그 시절은 '생활력 없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삶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마을 사람들 진료를 봐준답시고 동네를 돌아다녔지만 막상 돈이 되진 않았기에 집안일과 바깥일 모두 할머니의 역할이었다.


 그때의 할머니에게 가장 충격적인 일은 전쟁이었다고 하셨다. 625 전쟁 당시 할머니는 고령에서 전쟁 소식은 크게 듣지 못한 채로 여느날과 똑같이 일을 하고 계셨다. 밭을 갈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마을에서 처음 보는 외국인들이 할머니에게 총을 들이대며 알아듣지 못 하는 꼬부랑 말로 할머니를 위협했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면 금방이라도 쏴 버릴 것 같은 외국인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들고 있던 나무 소쿠리가 바닥에 떨어졌고 '난 모릅니다. 몰라요. 저는 몰라요.'라는 말 외에는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철그럭하는 소리와 함께 방아쇠가 당겨지는가 싶어 눈을 질끈 감고 '이제 난 죽었구나'하고 있던 찰나에, 어떤 젊은 한국인이 그 외국인들에게 뭐라뭐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셨다. 그러자 외국인들이 총을 내려놓고 길을 떠났고, 긴장이 풀려 주저앉은 할머니에게 그 젊은 한국인 친구가 다가와 '이 근처에서 신고가 들어와서 오해가 있었나 봐요, 어서 집에 들아가시고 멀리 나오지 마세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한동안 외출을 못 할 정도로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렸다고 하셨다. 나는 전쟁을 겪은 할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게 어떤 건지 여쭤보았다. 난 잠을 잘 수 있고 비와 총탄을 피할 수 있는 집이 가장 중요할 거라 생각했다. 할머니는 집은 있으면 좋지만 전쟁통에는 집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셨다. 전쟁 속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밥이라고 하셨다. 밥이 있어야 내일도 있는 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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