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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송이타파스 Sep 27. 2020

09. 할머니의 어린 시절. 고령에서 대구까지(2)

 종전 소식을 듣고서야 할머니는 자유롭게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작은 시골마을 근처 논밭에 나갈 때조차 긴장하며 주변 사람을 경계해야 했던 할머니는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작은 마을이라 큰 피해는 없었지만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당장 필요했던 건 삶을 이어갈 돈이었다. 필요한 것들을 시장에서 사 와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할머니는 농사지은 것들을 팔기 위해 고령에서 대구까지 매일 걸어 다니며 생계를 꾸려갔다. 돈이 없어 버스를 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던 할머니의 발은 성할 날이 없었다. 어느 날 할머니의 친척오빠가 할머니에게 도움을 주고자 연락을 해 왔다. 친척오빠는 양말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할머니에게 싼 값으로 물건을 떼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걸 팔아서 나오는 수익은 할머니가 가지는 구조를 제안했다. 돈이 될 만한 거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던 할머니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할머니는 아침에 시부모님과 남편에게 밥을 해 준 뒤, 맞이였던 우리 엄마의 손을 잡고 대구로 왔다. 할머니는 공장에 가서 양말을 받아와서 시장으로 갔다.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했기에 필사적으로 장사에 매달렸던 할머니는 매일매일 부지런히 시장에 갔다. 그렇게 몇 달을 또 보냈다. 할머니의 장사를 지켜보던 친척오빠는 이번엔 공장을 같이 운영해보자고 했다. 당시의 공장은 지금과 같은 대규모 공장에 수십 명의 종업원이 있는 게 아니라 소규모의 직원들이 미싱을 돌리는 정도였다. 당시 친척오빠의 공장이 잘 되어가고 있었고, 이를 함께 할 사람을 구하고 있던 차에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두 명의 종업원과 같이 일을 했다. 그 작은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의 수도 늘어갔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면서 할머니에겐 종잣돈이 생겼다. 아끼고 또 아낀 돈으로 할머니는 서문시장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고령에서 대구로 오는 시간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 대구에 집을 사서 출퇴근을 했다. 외삼촌들이 자라면서 대구로 거주지를 옮기는 건 필수가 되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아껴 삼 남매를 대학에 보냈고 결혼

을 시켰다.




 할머니는 당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하거나 귀찮아하신 게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기에 얘기할 기회가 없었던 거였다. 나는 두 시간가량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는 엄마가 몰랐던 것들도 잔뜩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할머니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는 음식을 남기는 것과 필요 없는 옷을 사는 것을 싫어하셨다. 마음이 편한 것이 최고라고 종종 말씀하시곤 했다.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다. 내가 모르는 할머니의 세상 속에서 할머니는 전쟁을 치렀고, 고령에서 대구까지 매일 걸어 다녔으며, 삼 남매를 올바르게 키워내셨다. 우리 할머니는 이렇게나 멋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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