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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송이타파스 Sep 04. 2022

이 여름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면

작은 의지 한 조각으로

그냥 지금 이대로 있으면 안 될까. 머리카락이 빠지든, 피부가 푸석해지든, 살이 빠지든, 밥을 못 먹고 잠을 못 자든, 매일 두통에 시달리고 사람과 대화하는 게 싫어지든. 그 어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피해 주지 않는다면 괜찮은 게 아닐까.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결국 시간의 문제 아닐까. 내 친구들이 아픈 것처럼 나도 그저 아픈 사람의 범주에 포함된 거 아닐까.


이 생각으로 1,2주를 더 버텨냈다. 매일 잠들기 전 새벽녘 창문 너머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다 블라인드를 내렸다. 다들 정말 열심히 살았다. 해가 뜨기 전 일어나 세수를 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아직 형광등이 꺼지지 않은 지하철 출입구로 들어갔다. 날이 흐리든, 맑든, 비가 오든, 천둥 번개가 치든 그들은 하루를 살았다. 하루에도 온갖 이유로 수백 명씩 사망하는 이곳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매일을 치열하게 살았다. 그들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들을 동경하지도 않았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과 나는 달랐다. 그들은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걷겠지만 나는 비가 오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비가 오네. 비가 오는구나. 우산을 쓰든 쓰지 않든, 출근을 하든 안 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 삶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이 상태로 삶이 끝나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왔고 많이 행복했다. 안 좋은 날 보다 좋은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나는 '나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회사에 출근한 날이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회사 앞 호수를 걸었다. 지독한 폭염에 회사 밖으로 열 걸음만 나가도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 더운 날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출근길에 신었던 불편한 구두를 그대로 신고 호숫가로 걸어 나갔다. 매일 운동하는 주민들 몇 명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다. 천천히 땅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조금만 걸어도 얼굴과 손이 다 타는 것 같았다. 벌레는 또 어찌나 많은지 송충이, 거미, 귀뚜라미 등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한 바퀴 돌아서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온 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이미 얼굴과 손은 다 타서 회복이 안 될 것 같았다. 화상이라도 입지 않았으면 다행이었다. 이 말 같지도 않은 상황에 나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무슨 회사 점심시간에 땀이 미친 듯이 나도록 걷는단 말인가.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니 초록색 활엽수 잎이 하늘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땀을 말려주었다. 멈춰 서서 소리를 듣고 있자니 풀벌레 소리와 호수 위로 떠다니는 오리의 물장구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은 풀잎 냄새와 어디선가 불어오는 달콤한 열매 냄새가 코 끝을 스쳤다. 내가 좋아하는 여름과, 내가 좋아하는 바람과, 좋아하는 냄새가 가득했다. 여름 냄새는 비 온뒤에 땅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축축한 풀뿌리 냄새 같기도, 따뜻하게 구워진 아스팔트 위의 새똥 냄새 같기도, 코를 찌르는 듯한 더위 속에 숨겨진 보석 같기도 했다. 그들이 나를 감싸고 지나갈 때 나는 구름 위에 붕 뜬 느낌이었다. 이 폭염 속에서도 기분이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항상 삶의 끝자락에서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내일 당장 죽는다면 나는 이 끈적하지만 불쾌하지않은 여름 냄새가 그리울 것 같았다. 푹푹 찌는 듯한 더위에도 세상 떠나가라 울어대는 매미소리도 그리울 것 같았다. 그래도 살아있다면 이 여름을 한 번 더 볼 수 있을 텐데. 지독히도 더운 날이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흔적들이, 아직 세상은 한 번은 더 살아 볼 만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정말 작은 의지 한 조각이지만 그 한 조각이 나를 붙잡았다.


어쩌면 2017년 한여름에 폭염을 뚫고 아무것도 없는 몸으로 걷기만 했던 그 날들, 더 이상 내게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무렵 마지막으로 스페인에 가보자 해서 무작정 떠났던 그 해 여름. 그 여름의 내가 지금의 내게 준 선물이 마음속 깊은 곳에 아직 남아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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