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봄 꽃 이야기 -
꽃을 보러 간다. 붉은 동백을 보러 여수 간다. 매화가 운전을 하고, 난 그 옆에 앉아 여수 이야기를 한다. 오래전 보았던 여수 바다며, 오동도 동백꽃 얘기를 한다. 내 고향 강경을 지날 때는 눈물의 시인 박용래를 떠올린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술을 마실 때 눈시울 붉히지 않은 적이 없었다던 시인 얘기를 한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창밖은 햇살이 환한데 ‘저녁 눈’을 웅얼거리는 내 입 안에선 눈이 내린다. 내게도 ‘저녁 눈’ 마지막 행을 읽을 때마다 눈시울이 젖어들던 때가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국화 언니가 옛날이야기를 꺼낸다. 대전에서 대학을 다닐 때 시 동아리에서 박용래 시인을 초대해 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뒤풀이 술자리에서 그렇게 많이 울더라고. 그 시인은 동백꽃 앞에서도 꽃 빛깔만큼이나 눈자위가 붉어지도록 울었을 것이다. 꽃구경 가는 차 안이 아련한 추억으로 젖어든다.
지난 주말엔 사군자 모임에서 일박 이일로 여수를 다녀왔다. 사군자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다 가까워진 네 여자가 언니 동생 하며 지내는 모임이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각자에게 어울리는 별명도 하나씩 지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땐 함께 기쁨을 나누고, 힘든 일이 있을 땐 서로 위로하며 힘이 되어준다. 계절이 바뀔 때면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내가 가고 싶어 했던 남도의 여수였다. 내 기억 속엔 여수 풍경 몇 컷이 새겨져 있다. 향일함에서 본 쪽빛 바다, 오동도에서 바라보았던 바다 건너 아늑하게 이어지던 해안선, 동백나무 회백색 가지 아래 둥그렇게 펼쳐져 있던 붉은 꽃자리이다. 지중해의 어느 해안을 떠올리게 했던 여수 바다가 보고 싶었다. 꽃송이 채 뚝뚝 떨어져서도 붉은빛이 선연했던 동백을 만나고도 싶었다. 뜨거운 심장이었다가 절규였다가, 가 닿지 못한 마음이었다가, 부르다만 노래 같던 동백꽃이 보고 싶었다.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해상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이 이국적이고 아름다웠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섬 오동도는 자그마했다. 오동도는 섬 모양이 오동잎을 닮아 오동도가 되었다고 한다. 돌산공원에서 내려 방파제 길을 따라 오동도로 걸어갔다. 걷는 내내 내 기억 속의 바다를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바다 가운데까지 몇 겹의 방파제와 시설물이 들어앉아 복잡하고 어수선하게 변해 있었다. 오동도 동백 숲은 예전에 왔을 때보다 울창해진 것 같았다. 숲을 가득 메운 동백나무 아래 동백꽃들이 흩어져 있었다.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푸른 잎 사이로 얼굴을 내민 붉은 꽃들이 벙긋거렸다. 난 떨어진 꽃잎을 주워 들고 향기를 맡았다. 황홀한 빛깔을 지니고도 향기가 없었다. 동백꽃은 향기가 없는 대신 빛깔로 동박새를 불러 꿀을 주고 번식하기 때문이다. 용굴 쪽으로 내려가는 길 동백나무 발치에 떨어진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꽃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순간 내 마음 한편에 붉은 꽃 한 송이 들어와 앉는 듯했다.
이튿날 돌아오는 길 광양 매화 마을에 들렀다. 아직 꽃이 피기엔 일렀지만 날씨가 따뜻하니 매화를 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여천 산업단지를 지나 광양으로 향했다. 섬진강을 지날 땐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벚꽃이 필 때 굽이굽이 십리 벚꽃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삼월이면 골짜기마다 하얀 꽃구름이 내려앉는 매화마을은 얼마나 꿈결 같은지 늘어놓으며 매화 마을 입구에 닿았다. 길가에 하얗게 꽃이 핀 매화나무가 있었다. “와, 정말 매화가 피었네. 저기 매화가 피었어요.” 얼마를 더 가니 홍매화 가로수길이 나왔다. 내가 소리쳤다. “저기 좀 봐요. 홍매화가 피었어요.” 나이 든 여자들 넷은 꽃을 만난 반가움에 어쩔 줄 몰랐다. 우린 잔뜩 기대에 부풀어 매화마을에 도착했다. 매화밭 골짜기엔 아직 봄이 도착하지 않았는지 하얀 꽃구름도 꿈결 같다던 꽃길도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 가장자리의 언덕길을 따라 홍매화 붉은 꽃만 피고 지고, 햇볕 잘 드는 계단 옆의 백매화 한 그루가 바람에 향기를 날리고 있었다. 서둘러 핀 매화가 달콤한 향기로 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지 벌이 윙윙거렸다. 벌들 사이에서 매화 가지를 코에 갖다 대고 흠흠 거렸다. 사군자 중 막내인 매화는 만발한 홍매화 아래서 꽃보다 환하게 웃었고, 난초, 대나무, 국화 얼굴에도 붉은 꽃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좋은 날이었다. 꽃을 보아 좋은 날이었다. 그리운 동백을 보아서, 향기로운 매화를 만나서 좋은 날이었다. ‘꽃피는 아침에는 절을 하여라/ 피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걸어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 꽃 지는 저녁에도 절을 하여라/지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돌아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 (운주사에서 부분/ 정호승)’ 봄이 오는 길, 피는 꽃을 보고 우러르고, 지는 꽃을 보고 절을 할 수 있어 좋은 날이었다. 서로에게 꽃받침이 되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꽃을 보아서 좋은 날이었다.
2020.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