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를 찾아 떠나다

-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빛깔과 무늬가 있다 -

by 혜아


퇴임한 지 이 년 반이 지났다. 첫해는 퇴임하면 꼭 해야지 벼르고 있었던 일들을 원 없이 했다. 국내외로 여행을 떠났고, 운동으로 걷기, 탁구에 근무할 땐 꿈도 못 꾸었던 골프도 배웠다. 시간을 못내 읽지 못했던 장편 소설을 읽고,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며 책을 읽고 에세이도 썼다. 일에 매여 못했던 일들을 맘껏 할 수 있는 자유가 마냥 고마웠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퇴직 후 누리고 있는 자유와 기쁨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두 번째 해는 정반대의 삶이 펼쳐졌다. 갑작스레 발생한 코로나-19는 외국에서 공부하며 살아보려던 꿈을 접게 했다. 팬데믹 속에서 감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집에 머무는 동안 지병이 악화하여 일 년 내내 병원과 약을 달고 살아야 했다. 퇴직 후 첫해의 의욕과 활기는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고립과 단절 속에서 급격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며 두려움이 밀려왔다. 무기력한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무언가가 절실했다. 규칙적으로 외출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뇌세포를 깨워줄 배움이 필요했다.

다시 나를 찾아 나선 첫걸음은 그림책을 활용한 독서심리상담 강좌였다. 첫날 강의실에 들어서는데 다시 학생이 되어 뭔가를 배운다는 게 설레고 기대됐다. 강의실 안엔 일인용 책상 위에 사회적 거리 두기용 투명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독서심리상담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아를 강화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능력과 습관을 길러주는 게 목표라고 한다. 독서 치유에서 등장인물과의 동일시, 카타르시스, 통찰 경험은 자아존중감 형성과 정서적, 심리적 문제해결의 주요 원리이다.



심리이론과 함께 읽은 황성혜의 그림책 《파랗고 빨갛고 투명한 나》는 ‘모든 존재는 각각의 개성을 지닌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준다. 두꺼운 책 표지에 파랗고 빨간 도형 무늬가 있는 투명 커버가 씌어 있다. 투명 커버의 무늬들이 표지 위의 동그란 얼굴에 겹쳐지면서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만들어 낸다. 면지에 있는 하얀 실타래 모양의 동그라미가 다음 장에선 빨갛게 채워져 있다. 표지에서부터 비어있던 자리에 무늬가 겹쳐지고, 색깔이 채워지면서 서로 다른 존재와 자아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선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소중한 존재임을 동그라미, 세모, 네모의 단순한 도형과 색깔들을 통해 들려준다. 동그라미는 모두 동그랗지만 같은 동그라미가 아니다. 파란 꿈이 찾아와 남긴 파랑도, 새빨간 열정이 남긴 빨강도 모두 다르다. 어떤 모양으로든 바뀔 수 있는 상상은 투명으로 찾아온다. 투명은 모든 존재가 지닌 가능성을 맘껏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빽빽한 미로의 모습으로 갈등이 찾아오고, 모두를 사라지게 할 것 같은 아픔과 어둠, 절망을 상징하는 검정도 찾아온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눈동자들은 온 힘을 다해 어둠을 뚫고 빛줄기를 향해 걸어간다.


“ 파랗고 빨갛고 투명하고 복잡한 나. 나는 이런 내가 좋아요.”


그림책 속 동그라미들처럼 사람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서로 다른 꿈과 열정으로 자신만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그 과정에서 갈등과 아픔, 절망도 겪는다. 각각의 존재엔 꿈과 열정이 만들어 내는 밝고 화려한 빛깔의 무늬와 아픔과 절망이 만들어 내는 어둡고 칙칙한 무늬가 함께 새겨진다. 그 무늬들이 어우러져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이 그림책에 나를 비추어보니 지금의 난 어둡고 칙칙한 색깔을 걷어내고, 다시 파랑과 빨강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나는 누구일까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책 속의 그림과 이야기를 따라가며 한 사람의 안에는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 관계와 상황 속에서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좌절과 갈등을 겪으며 어둠 속에서 헤매지만 결국 자기만의 빛깔과 무늬를 찾아간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권의 그림책을 여러 사람과 나누며 책에 담긴 의미가 확장되는 경험도 했다. 오랜만에 학생이 되어 강의를 듣고, 사람들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깨어나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오그라들어 있던 몸과 마음도 조금은 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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