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매듭을 풀어가는 여정
- 윤대녕의 <상춘곡>을 읽고 -
윤대녕 소설집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를 읽었다. 대부분 1990년대 후반에 쓰인 작품들이다. 첫 작품 <상춘곡>을 읽을 때부터 소설의 배경과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소설 속 주인공이나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 더 깊이 빠져든 것 같다. <상춘곡>, <삼월의 전설>에 등장하는 선운사, 쌍계사, 운주사는 삼십 대 무렵 불자도 아니면서 자주 찾았던 곳이다.
삼십 대 후반쯤 동료들과 오래된 가수의 노래 ‘선운사’를 흥얼거리며 선운사에 간 적이 있다. 그땐 늘 마음속에 뭔가가 차오르며 들끓던 때였다. 풍천장어에 복분자주를 마시며 속에 쌓였던 것을 많이도 토해냈었다. 혼자였을 땐 미당의 ‘선운사 동구’를 읊조리며 갔었다. 하지만 갈 때마다 벚꽃도 동백도 본 적이 없다. 늘 마음에 봄이 먼저 온 까닭이다. 어느 가을, 늦은 저녁엔 선운사 가는 길 꽃무릇 붉은 꽃 무더기에 안에서 끓어오르던 것들을 꺼내 태우고 온 적도 있다. <상춘곡>을 읽는 내내 오랜 세월을 거슬러 막막하고 쓸쓸했던 내 청춘의 봄날 속을 걷는 듯했다.
불교적 색채
<상춘곡>은 서간체 소설이다. 화자인 ‘나’가 열흘 동안 선운사 동구 동백장에 머물며 ‘당신’으로 불리는 여인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는 그녀와의 만남과 헤어짐, 해후, 다시 인연을 잇게 되는 여정을 그린다. 화자는 선운사에 내려온 사흘째부터 편지를 쓴다. 선운사는 그녀가 태어난 땅이자, 십 년 전 화자가 그녀와 인연을 맺은 곳이다.
시적인 문체로 쓰인 아름다운 이 작품은 불교적 색채가 진하게 배어있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은 절이거나 암자, 아니면 그 근처이다. 적멸, 환생, 아기 돌부처, 침향 등 불교와 관련된 낱말이 자주 등장한다. ‘삼인전’ 화가 중 한 명인 눈물점의 여인은 뒤풀이 자리에서 불경인 “법성계”와 “천수경”을 왼다. 화자가 기다리던 벚꽃을 어둠 속 만세루 안에서 본 것도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결과이다.
이야기는 불교의 ‘인연’에 기대어 전개된다. 화자와 그녀(란영)는 질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고종사촌 오빠이자 화자의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인옥이 형은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준다. 세월이 지난 후엔 끊어진 연을 다시 잇게 해 준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선운사는 화자와 여러 겹의 인연이 있다. 그녀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고, 미당 선생과의 만남으로 마음의 눈을 뜬 곳이자, 잃어버린 아이의 환생을 만난 곳이다.
화자는 선운사 도솔암으로 가는 길모퉁이에서 세월에 풍화되었지만 천진한 웃음이 남아있는 아기 돌부처 만난다. 도솔암 마애불 앞에선 무수히 피어있는 동백꽃을 본다. 도솔산 중턱 대숲에 둘러싸인 참당암에서 내려오는 길에선 사내아이를 업고 내려가는 삼십 대 후반의 아낙네를 본다. 화자가 본 것은 모두 화자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연으로 이어진다. 아낙의 등위에 업힌 아이가 아기 돌부처가 되고, 그 아기 돌부처는 다시 동백이 된다. 선운사 옆 시냇물에서 만난 붉은 잉어 한 마리가 다시 동백꽃이고 아기 부처가 된다.
화자는 자신이 그녀의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잃어버린 아기가 어느 날 돌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아기 돌부처가 도솔암에서 만난 동백과 냇가의 붉은 잉어 한 마리로 환생해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라 여긴다. 한번 맺은 연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이어진다. 생명이 있는 것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는 불교의 윤회사상이 소설 속에 녹아있다.
시적 묘사와 분위기
화자는 편지의 서두에서 “막걸리 먹고 취한 육자배기 가락”으로 편지를 쓰겠다고 한다. 미당의 시 ‘선운사 동구’의 한 구절이기도 한 이 표현에선 묻어두었던 마음을 거침없이 솔직하게 쏟아내겠다는 마음이 엿보인다.
<상춘곡>에는 날카롭게 벼린 오감으로 빚어낸 시적 묘사가 가득하다. 스물여섯 그녀의 목소리는 “명주실”로, 이혼 후 목소리는 “짚신의 서걱거림”으로 묘사된다. 인옥 형의 전화 목소리는 “화전을 갈고 나온 사람처럼” 지쳐있고, 술집 주인 여자가 부르는 노랫소리는 “왕겨를 털어낸 겨울 찬 사과 맛”처럼 맑고 깨끗하다. 쉰 목소리에서 “짚신의 서걱거림”을 듣고, 노랫소리에서 “겨울 찬 사과 맛”을 떠올린다. 청각이 자연스레 미각으로 연결되고 있다.
화자가 석상암 요사채에서 어느 날 아침에 들었던 소리에 대한 묘사는 절창이다. “머리맡 문살 창호지에 바늘 끝 같은 것이 타닥타닥 튀는 것 같은”,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연둣빛 봄 햇살 소리”는 어릴 적 아침마다 창호지 문 가득 쏟아져 들어오던 하얀 빛살을 떠올리게 한다. 화자의 얼굴에 번졌던 환하고 따스한 기운은 “얼굴에 감겨드는 이상한 빛의 속삭임”, “은은하고 부드러운 생기가 느껴지는 빛”으로 묘사한다. 극도로 섬세한 청각과 시각, 촉각이 만들어낸 묘사로 오감을 온전히 열어놓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표현들이다.
화해
화자는 그녀와 헤어진 뒤 곰팡이라고 불릴 만큼 “스스로에게 갇힌 삶”을 살았다. 인옥이 형의 초대로 삼인전에 갔던 날 “풀 게 있으면 사람들과 함께 풀고 살아야 할까 보다” 생각한다. 이는 화자가 마음을 빗장을 열고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겠다는 신호이다. 석상암 산신각 앞 수선화를 보았을 땐 “마음을 털어내고 나서야 사물이 스며들 틈”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는다.
칠 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화자는 그녀에게서 전에 없던 틈을 보았다. 그 틈은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는 “바로 그 틈”이었다. 과거의 그녀는 “반들반들한 쇠북 같은 사람”이어서 “나 아닌 다른 것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제 화자에게도 그녀에게도 서로에게 끼어들 틈이 생긴 것이다. 자신을 가두었던 자폐의 시간,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혀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시간에서 벗어나려는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선운사 동구에 머문 지 열흘째 날, 화자는 짐을 꾸린다. “영산전 목조삼존불에서 퍼져 내린 향내에 발목을 묻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가까이선 서로 진실을 말할 나이가 지났는지도 모른다고.”,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 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 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된 것”이라고. 침향은 나무의 상처 부위에 모인 수지가 수년에서 수천 년에 걸쳐 응결된 덩어리로 불 속에 넣으면 상쾌한 향기를 내며 탄다고 한다. 마지막 편지 “향”에서 화자는 자신과 화해하고, 오랜 세월을 돌아 다시 만날 그녀와 화해한다. “침향”처럼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남은 세월을 보내려 한다. 그녀의 집 앞산에 벚꽃 피는 날, 화자가 놓고 올 동백기름이 그녀와의 인연을 이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