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과 정원의 날 -
올해가 환갑이다. “환갑”이라고 써 놓고도 믿기지 않는다. 멀게만 느껴지던 그날이 마침내 내게도 찾아왔다. 낯설고 어색해 마음이 거부하는 환갑을 자주 삐걱거리는 몸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같다. 지난 1월(2025년) 환갑 생일은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싱가포르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마음 같지 않은 몸이 지난 여행에서 환갑나이를 실감케 했다.
여행지를 싱가포르로 정한 건 십 년 전 친구와 갔던 싱가포르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이었다. 보타닉가든(Botanic Garden)의 열대림과 진분홍으로 휘늘어진 부겐빌레아 꽃가지, 내셔널 오키드 가든(National Orchid Garden)의 휘황했던 난의 향연, 케이블카를 타고 센토사섬으로 가는 길에 보았던 푸른 바다와 섬의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던 풍경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남편과 아들의 오케이 답변을 듣자마자 난 여행 앱을 통해 항공권을 끊고 호텔을 예약했다. 여행 일정을 짜기 위해 최신판 싱가포르 여행 책자도 샀다. 싱가포르는 크기가 733.5㎢인 아주 작은 나라였다. 우리나라의 경남 함양군 넓이와 비슷했다. 내게 싱가포르는 작지만 깨끗하고 안전한 나라, 볼거리와 먹을거리, 느낄 거리가 풍성한 나라로 새겨져 있었다.
여행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출발 전 온라인에서 입국신고서를 작성해 놓아 입국 절차가 간단했다. 공항 매점에서 이지링크(ezlink) 교통카드를 사려고 했는데 자동발권기에서 쉽게 살 수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서 호텔까지 이동을 걱정했지만, 택시 승차장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가 있어 호텔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문제는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 후 방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에어컨을 얼마나 세게 틀어놓았는지 에어컨을 껐는데도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남편과 아들에겐 상관없었지만, 비염과 축농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내게 추운 호텔 방은 불편한 여행의 전조와도 같았다. 점퍼를 입고 마스크를 쓰고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한 번 몸속에 파고든 한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몸을 데운 후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다행히도 어젯밤의 추위는 가셔있었다. 우린 아침으로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영혼의 음식(Soul Food)이라는 카야 토스트를 먹기로 했다. 호텔 근처에 카야 토스트 분점이 있었다. 가게 앞 대기 줄이 길어 우린 한참을 기다린 후 겨우 주문할 수 있었다. 카야 토스트는 카야 잼을 바른 토스트에 커피, 수란이 세트로 나왔다. 토스트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달콤한 커피와 수란을 곁들여 먹는 맛이 좋았다. 아침 식사 후 우린 클락 키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보타닉가든으로 향했다. 시골집에서 정원을 가꾸고 있는 내게 여행지에서의 식물원 방문은 늘 필수 코스였다.
1859년에 영국식으로 조성된 보타닉가든은 무려 165년의 역사를 지녔으며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보타닉가든 내에는 내셔널 오키드 가든, 생강 정원, 치유 정원, 세 개의 커다란 호수, 수없이 많은 산책로와 숲이 조성되어 있다. 그중 삼천 여종의 난들을 볼 수 있는 내셔널 오키드 가든은 내가 가장 고대하는 곳이었다. 우린 네이피어역에서 내려 보타닉가든 서쪽 끝에 있는 탕린 게이트에서부터 걷기로 했다. 그런데 역에서 내리면 바로 옆에 있어야 할 게이트가 한참을 걸었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아침 산책을 하는 사람들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게이트 위치를 물었지만, 대부분이 관광객들이어서 잘 모르고 있었다. 몇 번을 물은 뒤에야 우리가 게이트 반대쪽으로 걷고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린 이십 분 가까이 헛걸음을 하고 나서야 식물원 입구에 도착했다. 식물원에 들어서자마자 산책길 양옆으로 울창한 열대 숲이 이어졌다. 우린 짙은 숲 향기를 맡으며 우람한 나무들 사이로 난 숲길을 걸었다. 숲을 비추고 있는 초록빛 호수, 호숫가에 늘어선 붉은 꽃들, 한가로이 떠 있는 백조 한 마리… 아름답고 호젓한 호숫가를 돌며 나는 연신 카메라 버튼을 눌러댔다. 평소 걷기 자체에 몰두하는 남편도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이 큰 나무들과 붉은 줄기의 열대 식물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길눈이 밝은 아들은 미로 같은 산책로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길을 안내하며 앞서 걸었다.
내셔널 오키드 가든엔 수천의 난꽃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눈 닿는 곳마다 화려한 빛깔에 희귀한 모양을 한 난꽃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노란 꽃이 다닥다닥 매달린 골든 샤워 트리 아치길을 걸을 땐 “아, 좋아, 너무 좋아.” 감탄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키드 정원을 도는 내내 비가 오락가락했다. 중간중간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은 온실에선 온몸에 파고드는 한기 때문에 서둘러 나와야 했다. 식물원 관람을 마치고 우린 마리나베이 쪽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난 전에 왔을 땐 날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부겐빌레아 나무에 꽃이 얼마나 화려하게 휘늘어져 있었는지 얘기하며 비 때문에 맘껏 즐기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우린 베이프런트역과 연결된 쇼핑몰에 있는 딤섬 레스토랑 딘타이펑에서 딤섬과 우육면 등 중국 음식으로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었다. 오래 걷고 난 뒤라서 배가 고팠는지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근처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픈 다리를 쉬게 한 뒤 가든스 바이더 베이 지역으로 이동했다.
높이 38m의 돔형 온실 식물원 “플라워 돔”에선 다양한 지중해성 식물들과 올리브 나무, 특이한 수형의 바오바브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클라우드 포레스트 돔”에선 아득한 높이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실내 폭포와 수직 정원에서 자라는 갖가지 꽃과 나무들이 빚어내는 풍경이 상상 속 천상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실내 정원 두 곳을 다 둘러보았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우린 “가든 랩소디” 감상을 위해 콘크리트 구조물에 수천 포기의 식물이 가득 덮인 슈퍼트리 그로브(Super Three Grove)로 발길을 옮겼다. 거대한 인공 나무숲에서 다양한 주제의 음악에 맞춰 환상적인 빛의 쇼가 펼쳐졌다. “아리랑”에 맞춰 빛의 쇼가 펼쳐질 땐 노래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젖히고 쇼를 관람했다.
마지막으로 싱가포르 야경을 보기 위해 마리나베이샌즈 스카이워크로 향했다. 지칠 대로 지친 발을 끌고 찾아간 스카이워크 입구에서 우린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안내원은 일주일 치 예약이 이미 완료되었다고 했다. 예전에 왔을 때 관람차 티켓을 현장에서 끊었던 기억 때문에 예약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역까지 거리가 꽤 멀었다. 난 절뚝이는 걸음으로 앞서가는 두 사람을 쫓아 겨우 지하철에 올랐다. 호텔 방에 도착할 때까지 발을 디딜 때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삼켜야 했다. 종일 걸은 걸음 수를 보니 거의 삼만 보에 가까웠다. 내 걸음으로 다섯 시간을 걸은 셈이었다.
보타닉가든에서 시작한 첫날 여행은 슈퍼트리 그로브의 가든 랩소디로 마치며 “숲과 정원의 날”이 되었다. 종일 걷느라 발가락은 물집투성이가 되었지만, 침대에 누웠을 땐 눈과 마음을 충만하게 했던 풍경들이 떠오르며 이런 게 바로 여행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