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버드 파라다이스와 센토사섬 -
둘째 날 아침 우린 버드 파라다이스로 향했다. 십 년 전엔 “주롱 새 공원”이란 이름의 새 공원이었다. 주롱새 공원은 간발의 차이로 지하철을 놓쳐 친구와 떨어졌었던 경험 때문에 잊히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현재는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위치가 바뀌었고, 이름도 새들의 천국인 “버드 파라다이스”로 바뀌어있었다. 버드 파라다이스로 가는 지하철 노선이 없어 우린 그랩 택시를 이용했다.
버드 파라다이스는 전보다 규모가 훨씬 커져 있었다. 거대한 넓이의 하늘 그물 아래 조성된 숲에는 특이한 모양과 색깔을 지닌 수 천마리의 새들이 자유롭게 날고 있었다. 새들을 관람하는 중 비가 내려 수시로 우산을 접었다 펴야 했다.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아 어제부터 말썽이던 발가락 물집의 통증이 심해졌다.
“천천히 좀 가자. 난 걸을 수가 없다고요.”
내가 발가락 고통을 호소하는 중에도 남편과 아들의 발걸음은 가벼워만 보였다. 우린 홍학무리와 앵무새 그리고 낯선 이름의 생김새가 희귀한 새들과 사진을 찍었다. 거대한 새 공원 안에는 새의 종류에 따라 조성된 작은 공원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계단식 논을 모티브로 만든 구역에선 두루미와 공작새들을 만났다. 공원 안 원형극장에선 새들의 화려한 묘기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땐 홍학무리의 쇼가 끝나가고 있었다.
“아,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아까운 공연 놓쳤네.”
“공연 시간 미리 확인하고 올걸.”
공연이 끝날 무렵 도착한 우린 아쉬움을 달래며 시내로 돌아왔다. 저녁엔 고대했던 칠리크랩을 먹기 위해 전날 예약해 놓은 “레드 하우스 난향”을 찾아 클락 키 지역으로 갔다. 우린 칠리크랩과 함께 시리얼 새우와 채소볶음 종류인 깡콩을 주문했다. 난 주문한 음식을 다 먹고도 맵고 달콤한 칠리크랩 소스 맛에 푹 빠져 수저를 놓지 못했다.
레드 하우스를 나와선 전날 즐기지 못한 싱가포르 야경을 보기 위해 “리버 크루즈”를 탔다. 크루즈에선 조명으로 붉게 물든 영국식 다리와 물을 뿜어내고 있는 멀라이언 조각상과 황금빛 조명의 플러턴 호텔, 마리나베이 주변에서 펼쳐지는 불빛 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강의 크루즈에서 보는 야경은 이국의 낭만에 젖어 들게 했다. 이런 풍경과 낭만은 늘 여행 친구와 즐기곤 했었는데 가족과 함께하며 또 다른 행복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셋째 날 센토사섬에서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야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루지와 스카이 라이드를 탈 계획이었지만 비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십 년 전에도 1월 중순 같은 시기에 싱가포르에 왔었지만 그땐 한 번도 비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계속 비가 따라다녔다. 여행 운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보다. 단짝 여행 친구와 여행을 다닐 땐 늘 날씨가 좋았다. 그 친구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나한텐 날씨 천사가 따라다닌다니까.”라며 말하곤 했었다.
우린 할 수 없이 싱가포르 역사를 알 수 있는 실내 박물관과 세계 각국 유명인들 모습을 실제 체형과 표정으로 만들어 놓은 밀랍 인형 전시관 "마담투소 싱가포르"를 관람했다. 비가 잦아들었을 때 잠깐 해변 산책을 하는 것으로 센토사 여행을 마쳤다. 하버포인트에서 센토사섬을 오가는 케이블카에서 보는 풍경을 기대했는데 흐린 날씨 때문에 예전에 만났던 풍경은 볼 수 없었다. 회색빛 바다와 비에 젖어 우중충한 건물들이 마음마저 어둡고 무겁게 만들었다. 내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던 센토사섬이 비 때문에 남편과 아들에겐 실망스러웠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우린 맛있는 음식으로 실망한 마음을 달래려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사실 전날 점심에도 차이나타운에 갔었다. 안내 책자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전체 인구의 75%가 중국에서 건너온 화교이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광저우 성의 음식문화가 싱가포르에 스며들었다고 한다. 우린 차이나타운에 있는 “동방 미식”으로 향했다. 중국 쓰촨 지역의 음식이 전문인 이 식당의 음식들은 가격이 저렴하고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았다. 아들은 마파두부, 꿔바로우, 우육면, 토마토 달걀 볶음, 볶음밥 등을 주문했다. 같은 식당을 두 번씩 와서 먹어도 다시 오고 싶을 만큼 음식들은 푸짐하고 맛있었다.
저녁 무렵 우린 호텔에 맡겨 놓았던 짐을 찾아 창이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가는 길에는 올 땐 밤이라서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수형의 가로수를 볼 수 있었다. 비행기 탑승 시각이 자정 이후라서 우린 짐을 보관소에 맡기고 초대형 실내 정원 쥬얼(Jewel) 창이로 갔다. 폭포가 쏟아지는 실내 정원을 둘러보고 쥬얼 라운지에서 휴식을 취하며 탑승 시간을 기다렸다.
환갑을 맞아 다시 갔던 싱가포르 여행은 추웠던 호텔, 날마다 내린 비와 발가락 물집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식물원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실내 정원, 가든 랩소디의 불빛 쇼, 리버 크루즈까지 모든 순간을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어 좋았다. 해외여행에 별 관심이 없던 남편과 아들도 볼거리 먹을거리를 즐기며 만족스러워해서 다행이었다.
지난 여행을 돌아보면 편안했던 순간보다 힘들고, 고생했던 순간들이 더 생생하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곤 했다. 가족과 함께한 이번 싱가포르 여행의 불운들도 행복했던 순간들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언젠부턴가 더 나이 들었을 때 추억할 수 있는 가족과의 시간을 늘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싱가포르 여행은 그 추억 목록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