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동촌에서 만난 시인 윤동주 -
“이번 여름엔 백두산 여행 갈 거야.”
남편은 워낙 산을 좋아해 매년 여름과 겨울 방학이 되면 꼭 한라산을 올랐다. 한라산은 수십 번을 오르내렸지만 백두산은 가본 적이 없었다. 중국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서 미뤄두었던 것 같다. 그런 남편이 난데없이 백두산 여행 얘기를 꺼내더니 백두산 투어를 예약했다며 일정표를 보내왔다. 백두산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너무 많이 보아선지 기대가 크지 않았는데 일정표에 윤동주 시인 생가, 해란강과 비암산 일송정, 발해 유적지 탐방 등이 있어 여행이 기다려졌다.
백두산 기행은 2024년 7월 27일부터 7월 31일까지 헤이룽장성, 길림성, 랴오닝성 등 백두산 주변 지역과 백두산의 비경을 둘러보는 4박 5일 일정이었다. 7월 27일 청주 공항에서 밤 10시경 출발한 비행기는 자정 즈음 연길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시간은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연길이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 명 가까이 되는 우리 기행 팀은 연길의 해란강 호텔에 짐을 풀었다.
계획대로라면 이튿날 아침 송강하로 이동해 백두산 서파 풍경구와 서파 천지, 금강 대협곡 등을 둘러보아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가 여행을 시작한 날부터 백두산 산문이 막혔다. 비 때문에 입산이 통제된 것이다. 우린 할 수 없이 일정을 바꾸어 도문의 두만강 강변과 연길 민속촌, 명동촌의 윤동주 시인 생가 등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빗속을 뚫고 중국과 북한을 가르는 두만강 국경도시인 도문(圖們)으로 향했다. 도문은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속한 도시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함경북도 남양시와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 시기엔 요동 지역과 연결된 국경 방어선이었고, 발해 시대엔 발해 문화가 스며든 국제무역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엔 일본의 압제를 피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났던 사람들과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동했던 길목이었다.
도문에서 ‘두만강 87 거리’를 걸으며 북한 땅을 볼 수 있길 바랐지만, 비 때문에 하늘도 산도 강도 모든 게 흐릿했다. 도문의 두만강 국경 다리와 국경 전망대에선 북한 마을을 잘 볼 수 있다는데 날씨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두만강 건너편 산은 구름이 산허리까지 내려앉고, 강 위엔 중국 국기를 단 투어 배 한 척이 대여섯 명의 관광객을 태우고 떠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하나였던 땅에서 이웃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지난 수십 년을, 앞으로도 기약 없이 단절된 채 살아야 하는 현실이 낮게 드리운 하늘의 먹구름만큼이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도문을 출발해 조선족 민속촌이 있는 연길시로 향했다. 연길시의 조선족은 예전엔 중국 국적 조선인이라는 긍지와 정체성 강했으나 지금은 북한의 쇠락과 남한의 도외시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연길시 가는 길 양옆으론 푸른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초록 평원은 비를 맞아 더 짙푸르게 보였다. 저 평원 어디쯤 나라의 독립과 일제의 압박을 피해 떠났던 사람들의 자취가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한 시간쯤 달려 연길의 조선족 민속원에 도착했다. 민속원 주변은 빗속에서도 전통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짙은 화장에 화려한 한복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는 여행객들 대부분은 중국 사람들이었다. 민속원에선 한국의 전통 기와집과 정자, 청사초롱 모양의 가로등, 홍살문 그리고 잘 가꿔놓은 정원을 볼 수 있었다. 겉모습은 우리나라에 있는 민속촌을 닮았지만 전해지는 정서나 느낌은 달랐다. 어딘지 중국풍이 섞여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민속원을 둘러보는 동안 빗줄기가 거세지면서 빗물이 신발 속까지 차올라 걷는 내내 질퍽거렸다.
다음 목적지는 용정의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기대했던 곳, 1917년 12월 30일 시인이 태어난 곳이었다. 명동촌 입구엔 ‘윤동주 생가’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에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렜다. 그런데 생가 입구 커다란 바위에 쓰인 시인의 이름 위에 ‘중국 조선족 유명 시인’이라고 쓰여 있어 씁쓸했다. 중국의 동북공정 의도가 느껴져 마음이 불편하고 께름칙했다.
시인의 생가 주변 정원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시인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미색의 커다란 바윗돌엔 시인의 대표 시 <서시>가 새겨져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시인의 순결한 정신과 의지가 담긴 <서시>는 읽을 때마다 내 삶을 돌아보게 했었다. 시비들을 둘러보다 시 <가슴 3> 앞에 오래 서 있었다. 2연 4행의 짧은 시에서 춥고 어둡고 아프고 막막했던 시대를 살았던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오며 울컥해졌다.
불 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윤동주 시 <가슴 3> 전문 / 1936. 7. 24.
시 <장>을 읽을 땐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난과 설움, 고된 삶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시들고 가난한 삶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억척스럽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시인은 장마당 가득 가난한 삶을 펼쳐놓고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는 모습에서 생의 고단함과 숭고함을 동시에 느낀 것 같았다. 시 한 행 한 행에서 세상과 사람과 삶에 대한 시인의 연민과 슬픔이 느껴졌다.
시들은 생활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중략)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 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왼 하루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윤동주 시 <장> 부분 / 1937. 봄.
시인의 생가 한쪽 전시관에선 시인의 일대기를 담은 사진 자료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실에서 학사모를 쓴 윤동주 시인의 조각상과 삶의 이력,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시인은 1943년 독립운동 협의로 체포된 후 2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1945년 독립을 여섯 달 남겨둔 2월 16일 28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꽃 같은 나이에 남의 나라 차가운 형무소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며 고통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더 먹먹해졌다. 목숨이 꺼져가는 순간 시인은 짐작이나 했을까? 머지않은 날에 그토록 간구했던 빼앗긴 땅과 주권을 되찾게 되리란 것을, 슬픔과 치욕의 날들을 견뎌내며 써 내려간 시들이 훗날 사람들 가슴을 뜨겁게 울리게 되리란 것을.
짧고 순정했던 시인의 삶을 떠올리며 생가의 마루에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빗줄기가 잦아들 때쯤 온갖 감정들이 휩쓸고 간 명동촌을 떠나 내일은 부디 날이 개어 백두산에 오를 수 있길 기대하며 이도백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