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욕망과 번민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중)
2025년 12월 31일 아침.
편수냄비엔 겨란을, 곰솥엔 큼지막하게 썬 무를 넣고 어묵탕을 끓이고 있다,라고 파향이 밴 손으로 쓴다.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이면서도 날이 날이다 보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무얼 하며, 어떤 감정에 휩쓸렸더라. 끄트머리까지 들러붙은 이건 뭐지. 타이머가 울린다. 삶은 겨란을 찬물에 담그고 어묵탕에 파랑 다진 마늘을 넣고 뚜껑을 덮고 불을 끈다. 먹기 전에 한 번 더 끓이면 되겠다. 겨울빛 은총으로 환한 거실. 또, 하루가 높이 떴다.
이 집으로 이사 오고 얼마 안 돼서 화재경보가 울린 적이 있다. 토요일 아침이었고 집엔 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다른 입주민은 보이지 않길래 고갤 들었더니 베란다 창마다 사람들이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얼굴과 그림자가 멀어졌다 가까와졌다 하는 게 보였다. 커튼 뒤로 실루엣만 보이는 수줍은 베란다도 있었다. 혼자 덜렁 서서 부산하고도 은밀한 움직임을 올려다보던 대치(?) 상황은 내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끝났다. 그날 경보음에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나가면서 뭘 들고나가야 하나, 현관에 서서 집안을 보다가 핸드폰만 들고나갔다. 집으로 와서 찬찬히 집안을 둘러봤다. 얼마 있다 또 화재경보가 울렸을 땐 둘째 아이랑 있던 주말 낮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현관에 서서 경보음에 놀라 아이패드랑 인형, 지갑을 챙기느라 정신없는 아이를 기다렸다. 화재경보가 처음 울린 날, 집에 돌아와서 집안을 둘러보다가 이 집엔 내가 잃어버려서 아쉬울 게 없단 걸 알았다. 불에 타버려 속상한 건 물건이 아니란 것도. 내가 마지막까지 애지중지 보듬고 싶은 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게 아니었는데, 그게 기쁘고 슬펐다. 내가 끝끝내 무용하고 한심한 것이어서.
'달아나지 않아요. 단지 변할 뿐이에요. 이것이 우리의 욕망이자 운명이에요.'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중)
2026년 새해 아침.
날씨를 타는 나에게 겨울은 동면의 계절.
어제랑 엇비슷한 창밖 풍경을 어제랑 별반 다르지 않은 찌뿌둥한 몸으로 내려다본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밤 사이 뚝 떨어진 기온과 마음가짐. 언제나 모든 문제의 발단은 제동을 걸어봐도 통 들어먹지 않는 마음이다. 해가 바뀐다고 싱숭생숭할 것도 없는데 며칠 전엔 묵은 다이어리를 꺼냈다. 내지를 갈아 끼울 수 있는 팥죽색 가죽 커버로 된 그 다이어리는 30년도 더 전에 대학 선배한테 받은 새해선물이다. 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기록은 20여 년 전. 긴 시간 외면해 왔던 다이어리를 다시 꺼낸 건 읽고 쓰지 않아 몽롱하고 아득하고 깜깜했던 2025년을 뒤로하고 올핸 붉은말에 올라 타 볼까, 하고.
2025년엔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이 일어나고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터무니없는 세계처럼,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의 꿈결에서만 끝까지, 나였다. 지인들이 연출하거나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전할 때 말고는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고 이따금 극장에 갈 때도 언제나처럼 혼자였다. 유난히 음악 영화를 많이 봤다, 싶었는데 편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걸 보니 한 번 본 영화를 여러 번 봤다.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을 타고 흐르던 밥 딜런의 노래는 <아임 낫 히어>, <본 투 비 블루>, <스탑 메이킹 센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서칭 포 슈가맨>에 이르러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영화 팟캐스트 녹음하면서 나온 <월 E>와 <라비앙 로즈>는 녹음 끝나자마자 다시 봤는데, 그때 내가 이 영화들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친 손뼉은 <카사블랑카>에 올라타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을 끼고 비행했다. 돌고 돌아 오즈 야스지로의 <이른 봄>에 피어오른 그의 향기에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안고 내 사랑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에 착지하던 밤은 꿈보다 황홀했다. 스누피와 주토피아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가 개봉한대서 복습 삼아 이전 작품들을 쭈욱 훑다가 열린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와 <스파이더맨 :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선 거미줄을 타고 아찔하게 날아올랐다.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를 보면서는 나만 몰랐던 주동우 배우한테 반해 '한 놈만 패'는 버릇이 도져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주섬주섬 찾아보다가 영화도 영화지만 누군가한테 빠지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 그 몰입과 떨림에 짜릿했다. 그 얘긴 다음에.
독립영화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 으뜸은 단연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이겠다.
이 영화를 본 날은 평일 낮이었다. 텅텅 비어도 이상하지 않은 제법 큰 상영관이 빈 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차서 놀랐는데, 더 놀라운 건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불이 켜졌는데도 일어나서 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환하게 불 밝힌 극장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만 들려올 뿐. 그리고 <여름이 지나가면>, <부모 바보>, <최초의 기억>, <봄밤>이 기억에 남는데, 모두 GV까지 참석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여름이 지나가면> GV에선 관객들의 질문에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장병기 감독이 친근하게 다가왔는데, 우리는 완성을 향해 가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동료애 같은 거였을까. 권여선 소설의 어느 한 문장에서 출발한 영화 <봄밤>은 수환 등에 업힌 영경이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읊조리는 봄밤이 도돌이표처럼 자꾸 돌아왔는데, 취한 그녀가 뱉어내듯 읊조린 시구가 스크린 밖으로 찰랑찰랑, 흘러넘칠 듯 위태롭고도 촉촉했다. 잔 속에 담긴 투명한 소주처럼. GV 같은 행사에선 보통은 듣기만 하다 오는 편인데, 그날은 꼭 손을 들고 마이크를 잡고 말하고 싶었다. 시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엔 재개봉하는 영화들도 많아서 신이 좀 났었다. 궁금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첫 단독 연출작인 <대결(Duel)>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봤고, 몇 번이나 보려다 놓쳐 인연이 아니라며 돌아섰던 소마이 신지 감독의 <태풍클럽>을 보러 가던 날엔 버스 정류장 땡볕 아래서 히죽거렸다. 그날 극장엔 나 포함 달랑 둘이었는데, 두 시간 한정, 우리만의 아지트 같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터풀 라이프>와 겨울이면 빼놓을 수 없는 <러브 레터>는 3번쯤 봤는데, 볼 때마다 다른 장면이 보이고 다른 대사가 들리는 게 재밌고 신기했다. 시즌이 추가되면서 처음부터 정주행 하거나 괜히 그냥 한 번 더 본 시리즈물도 있었다. <블랙 미러>와 <트루 디텍티브>, <다크>, <올리브 키터리지>, <콩트가 시작된다> 같은. 셜록이나 아가사는 테이프였다면 늘어지도록 봐서, 패스. 새로 올라온 시리즈 중엔 <소년의 시간>과 <샌드맨>이 좋았다. 요즘에 본 영화 중에는 <포제션>과 <프랑켄슈타인>, <그저 사고였을 뿐>, <이제 그만 끝낼까 해>, <너는 나를 불태워>가 머리에서,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 <토리노의 말>, 단 한 편으로 나를 휘어잡았던 벨라 타르 감독의 <파멸>은 컨디션 난조로 놓쳤는데, 영화 전문 책방지기와 함께해서 GV마저 후끈했던 그의 또 다른 영화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는 역시나, 였다.
바로 그 영화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에 대해 말하려고 사설이 길었다.
구두공과 죽은 고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청년과 피아니스트가 나오는 이 영화는 술집에서 시작한다. 이제 막 문을 닫으려는 술집 한복판으로 나온 야누스가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와 태양이니 서 있으라 하고는 또 한 명을 데리고 나와 지구라고 하더니 태양을 돌라고 한다. 그리고 한 명을 더 데리고 나와 달이니 태양을 돌고 있는 지구를 돌라고 한다. 태양이 있고 태양을 도는 지구가 있고 지구를 도는 달이 있고…. 수도와 전기가 끊기고 땔감과 먹을 게 떨어져 가는 마을에 거대한 고래와 프린스(권력)가 온다는 전단지가 붙고 얼마 뒤 마을 광장에 컨테이너가 들어온다. 컨테이너 주위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불가로 낯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폭동이 일어날 거란 소문이 돈다. 야누스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피아니스트와 마을 밖으로 떠났다 돌아온 그의 아내 사이를 오가다 사람들 눈을 피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 고래를 본다. 고래 얘기를 하는 야누스한테 이웃 구두공은 그늘진 낯빛으로 몸조심하라며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본다. 다음날, 마을엔 불기둥이 치솟고 집으로 돌아온 야누스에게 구두공의 아내가 지난밤 남편이 들어오지 않았다며 혹시 어디 있는지 아냐고 묻는다….
'우리의 삶은 나뭇잎과 줄기고 샘물이자 바다 거품이에요.'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중)
시인 메리 올리버는 세상에는 구두공뿐만 아니라 몽상가도 필요하다면서 예술가들이 하는 모든 종류의 창작은 세상이 돌아가도록 돕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우려는 거라고 했다. 이 영화에 구두공과 예술가가 나와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보는 내내 그 말이 계속 생각났다. 세상이 돌아가도록 애쓰는 일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힘을 보태는 일. 그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그림이. 벨라 타르 감독은 <토리노의 말>에서 숨 쉬듯 반복하는 일상을 하품 나오게, 아니. 잠이 쏟아질 정도로 보여준다. 집안으로 빛이 들면 이불을 걷고 침대에 걸터앉아 잠옷을 벗고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부엌으로 가 감자를 그릇에 담아 식탁에 가져다 놓고 앉아서 숟가락으로 감자를 들고 입으로 가져가 씹어 삼킨다. 싱크대에서 창밖을 보며 그릇을 씻고 의자에 앉아 바람 부는 창밖을 보다가 양동이를 들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 놓고 마구간으로 가 말을 돌보고 감자를 그릇에 담아 밥상을 차리고 숟가락으로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가 씹어 삼킨다.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침대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고 이불을 걷은 다음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당긴다. 어두워진다…. 꺼져가는 빛과 함께 일상도 사라진다. 나도, 세계도, 우주도. 모두, 다.
'칼립소를 알아요?
칼립소는 어느 남자에게 사로잡혔지요.
그 뒤론 모든 게 끝이었어요.
그녀는 몇 년동안 동굴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중)
목구멍으로 밥알을 씹어 넘기고 캄캄해지면 누워 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작년에 내가 한 거라곤 그게 다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똥을 싸고 사랑하고. 산다는 이 하찮은 일은 또한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한가. 벨라 타르 감독은 영화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에서 죽은 고래의 거대한 몸을 훑다가 어디도 바라보지 않는 고래 눈을 들여다보는 야누스를 보여준다. 고래는 죽어서 슬플까? 아플까? 바다가 아닌 컨테이너에 갇혀서 답답할까? 그런 자신의 처지에 절망할까? 슬프고 아프고 답답하고 절망하는 건 고래가 아니라 고래를 바라보는 야누스다. 고래는, 자연은, 우주는 거기, 있을 뿐이다. 희망처럼, 절망도 인간의 몫이다. 태양이 있고 그 태양을 지구가 돌고 그 지구를 달이 돌고 고래는 죽고, 죽은 고래의 눈에서 야누스가 본 건 무얼까…. 해가 뜨고 볕이 들면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고 감자를 그릇에 담아 식탁에 놓고 의자에 앉아 숟가락으로 감자를 들어 올려 입에 넣고 씹어 삼키고…. 날이 저문다. 한 생(生)이 그러하듯.
리베카 솔닛은 필립 러빈의 시(詩) <전에는 한 번도>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가 섞여도 된다는 것,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번갈아 나와도 된다는 것, 서사가 간접적일 수 있다는 것, 산문도 시처럼 주제에서 주제로 건너뛰거나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장르란 선택일 뿐이라는 것도 배웠다. 나는 긴급한 것, 강렬한 것, 과잉되고 극단적인 것, 구속을 깨뜨리고 터져 나오는 문장과 서사를 원했다. 반대로 안도감을 구할 때도 있었다. 책에는 둘 다 있었다.'
영화 <봄밤>에서 컷은 시의 행처럼 배열되고 영화 <포제션>에서는 오르가슴과 공포가 뒤섞여 터졌다. 영화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모든 시제와 공간이 기억의 줄 위에서 생시와 꿈을 넘나들며 곡예를 펼쳤다. 체사레 파베세의 ‘레우코와의 대화’ 중 ‘바다 거품'을 여러 각주와 함께 각색한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는 이미지가 어떻게 음절이 되고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는지를 일상의 표정으로 보여줬는데, 그 되밀림은 파도만큼이나 강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이 영화들에 리베카 솔닛의 말을 대보고서 그녀가 말하려던 게 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시와 정치가 교차해도 된다. 꼭 서사가 주연이 아니어도 된다. 산문이라고 뛰거나 날아오르지 못할 것도 없다. 장르는 선택이다. 내가 원하는 것도 타오르고 폭발하고 다발로 부서지는 문장이다. 내가 쓰고 싶은 것도 천둥 같은 이야기다. 마침내 고요에 파묻히는.
'바로 여기
(지금 다시)
왜냐하면'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중)
영화 <최초의 기억>을 보던 날, 내내 누워만 있던 마음이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그날 GV에서 안선경 감독님이 그랬다.
이제 그만해야지, 하다가 정신 차려보면 또 하고 있더라고.
그 말을 하는 감독님 얼굴을 보는데, 왜인지 눈물이 났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바다에 닿았을 때 파도가 솟구치는 걸 봤다.
부글대는 박테리아 떼가 내게 눈짓하더니 이렇게 속삭였다.
"지금 달아나면 곧 네가 쫓게 되리."
"사랑하지 아니하면 곧 사랑하게 되리. 설령 짝사랑이라 해도."'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중)
2026년에도 끈기로운 어리석음 장착하고 꿈꾸는 몽상가로 터무니없는 대역죄를 짓자.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봄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덧
글 제목은 영화 <바람이 분다>에 나온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