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빛
며칠 전이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 핸드폰을 찾아 머리맡을 더듬었다. 톡이 와있다. 창문은 아직 검은빛에 싸여 있다. 막 다섯 시가 넘은 이 새벽에 광고는 아닐 테고… 은사님이다. 며칠 전 톡으로 꽃을 보냈는데, 배송지에 적은 전화번호가 틀렸단다. 파란색 동그라미로 틀린 부분을 표시하고 수정한 사진을 캡처해서 보냈다. 불면의 밤에 꽃구경하다 스승님 전화번호도 모르고 잠에 취한 제자 녀석이 괘씸하고 서운했나. 이 나이를 먹고도 꼭두새벽부터 꾸지람을 듣는 내 꼴이 하 우습다가 어, 그건 받는 사람이 입력하는 건데요? 실랑이인지 수다인지 모를 새벽톡을 한참 나누던 은사님이 설마 당신이 보낸 톡 알림음에 깬 거냐며 다음부턴 자기 전에 무음으로 해놓으란다. 원래도 무음, 지금도 무음 이랬더니 당신은 약속이 있어서 일어나야 하니 '연이'는 더 자란다. 네, 대답하고는 핸드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놓고 눈을 감았다. 눈알을 몇 번 굴리다 다시, 떴다. 잠이 올 리 없다.
죽음의 노크는 왜 유독 겨울에 잦은가.
예정대로라면, 나는 지금 길 위에 있어야 했다. 얼마 전, 시부상을 당한 언니와 함께.
조문하러 가던 그 저녁엔 낮에 내리던 눈이 비로 바뀌면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어깨가 더 움츠러든 것 같았다. 앞유리창으로 달려드는 저 작고 흰 건… 눈송이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부근이라고 알려줄 때쯤 비는 다시, 눈이 되었다. 대학 병원 장례식장에 들어서서 계단을 내려가니 복도 제일 안쪽 빈소 입구에 조카들이랑 나와 있는 언니가 보였다. 옆태가 홀쭉해진 언니 얼굴은 가까이서 보니 전보다 더 흰빛이 돌았다. 나도 시부모님 두 분을 겨울에 여의었는데, 우리 자매는 이마저 닮은꼴이다. 쑥, 빠져나간 존재들이 얼린 마음은 봄볕에도 쉬이 녹지 않는다. 어떤 잃기는 바깥의 볕이나 바람이 아닌 내 살점과 피를 원했다. 그 땔감으로만 녹았다. 남쪽에서 수목장을 치르고 온 언니는 자꾸만 떠나고 싶다고 했다. 그래, 가자. 길 위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다. 두 그루의 겨울나무가 되어 구름을 읽고 새의 날갯짓을 듣고 바람을 맡고 해를 더듬고 달빛을 매만지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기억을 털어낼 뿐. 지는 해를 향해 달리며 또 가자, 했다.
어지간히 몸을 추슬렀다 싶었는데, 탈이 났다.
종일 책상에 앉아 꼼지락거리다 자려고 일어나서 화장실로 갔다. 오줌을 누고 물을 내리려는데 변기가 빨갛다. 피. 피다. 언니한테 톡을 보냈다. 언니. 어. 여행은 봄에 가자. 날도 춥고. 그래. 언니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러자며 예약을 취소했다. 핫팩을 배에다 대고 천장을 보고 누웠다. 어릴 적엔 벽지 무늬로 이야기를 짓기도 했는데… 헤드라이트 불빛이 몇 번인가 천장을 가로질렀다. 밤을 꼴딱 새우고 아침도 거르고 병원에 갔다. 접수하는데 한 시간, 대기하는데 한 시간 반. 진료실에서 만난 의사가 물었다.
"요즘 스트레스가 심하셨나요? 잠은 잘 주무시고요?"
"스트레스는… 아, 뭐. 잠은 원래도 자알…."
대학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다. 저녁을 먹고 양치를 하는데 입에서 물이 새는 것 같았다. 어? 다시 한번 물을 넣고 입을 헹구면서 거울을 보는데 한쪽 턱밑으로 물이, 질질.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안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엄마! 나 입에서 물이 새! 찬 벽지 따라 손가락을 긋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밤을 눌렀다. 다음날 엄마 아부지랑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갔는데, 나를 진찰한 의사는 무슨 검사를 해야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엄마 아부지는 검사하려면 얼마가 드냐고 묻더니 굳은 얼굴로 진료실에서 나와 복도 저 끝으로 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왔다. 우리는 다시 진료실에 들어갔고 엄마는 검사는 됐고 치료만 해달라고 의사한테 말했다. 불필요한 검사로 나를 애먹일 수 없다고 했지만, 나를 포함해서 진료실에 있던 모두는 돈 때문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다음 날부터 나는 맨날맨날 혼자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고, 이듬해 봄엔 멀쩡한 얼굴로 학교에 다녔다. 병원에 처음 간 날이었나. 의사가 나더러 신경이 너무 예민해서 재발할 수 있으니 스트레스받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 말이 거슬렸던 엄마는 의사한테 한 마디 했다. 살면서 이 정도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어떻게 살아요? 그때 나는 스트레스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엄마의 무신경함이 조금쯤 부끄러웠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덥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떨궜다. 엄마 말에 이렇다하게 대꾸하지 않던 그때 그 의사가 했던, 예민하니 조심하란 그 말이 다정하면서도 어쩐지 무섭게 들려서 살면서 스트레스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같은 증상으로 병원에 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스트레스 때문에 혈뇨라니. 처음에 별 것 아니라는 듯 웃는 낯으로 증상을 물어보던 의사는 암 환자라는 나의 고해성사에 낯빛이 달라지더니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고 죄 많은 어린양은 술술 불었다.
'달은 참 재밌지?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변하니까.'
(영화 <원더풀 라이프> 중)
대설특보라는데, 창밖으로는 강한 바람을 타고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변하는 게 어디 달뿐이겠나. 저기 저 구름도 바람결에 모양을 바꾸면서 흘러가고 있지 않나. 오늘 예보된 눈도 온도에 따라 모양을 바꾸면서 지상으로 쏟아지고. 빛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일 뿐 저 하늘 어딘가에 달이 떠 있는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구름도, 눈도 어딘가로 흐르거나 쏟아지거나 솟구치고 있다. 물이었다, 공기였다, 빗방울로, 눈송이로 떨어지면서. 빛과 바람과 온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질 뿐, 달과 구름과 눈은 있다. 얼굴을 바꾸고 끝없이, 되돌아오면서.
엄마 말이 맞다. 엄마는 틀린 적이 없다.
스트레스 없이 사는 건 불가능하고 그때 그 의사 말처럼 유난히 신경이 예민한 나 같은 사람에게 그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비극의 아이인 나한테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는 더더욱 없고. 하루 세끼를 먹으면서도 밥 맛을 모르고 사랑을 하면서도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고 매일 자면서도 숙면이 뭔지 모르겠다. 이 나이를 먹어도 모르는 것투성이다. 자는 둥 마는 둥. 자다 말다. 그 기이한 상태가 일상의 내 잠이다.
"요즘 스트레스가 심하셨나요? 잠은 잘 주무시고요?"
언제부터라고 특정 지을 순 없지만, 혼자 쓰고 읽는 글에도 화장을 하는 나는 그날 의사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는 속앓이로 꽤 여러 날 잠들지 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