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나를 만나다.
'손님 여러분, 잠시 후 착륙하겠습니다. 좌석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기내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목소리. 코로나 이후 처음이다. 내가 다시 상하이에 오게 될 줄이야. 낯설 만큼 오래된 이 도시. 잊은 줄 알았던 감정들이 착륙과 함께 서서히 되살아난다. 화창한 날씨가 나를 환영해 주는 것만 같았다.
시내까지 단 8분, 마그레브 열차를 기다린다. 유학 시절엔 너무 익숙해서 아무런 감흥 없이 타곤 했는데 눈앞을 스치는 속도와 기술력에 다시금 감탄하게 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초록 들판은 어느새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행렬로 바뀌어 스쳐 지나간다. 귀가 멍멍해지는 낯익은 감각, 오히려 반가웠다. 창틀에 살짝 기대어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곧바로 길을 나섰다. 그리운 이름들을 만나러 가는 길. 조금 빠른 발걸음을 보니 마음이 먼저 도착한 모양이다.
‘와, 상하이엔 이제 18호선까지 생겼구나.’
낯선 역명들이 스쳐 지나가고 어느 순간 익숙한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전광판에 떠오른 ‘복단대학역(复旦大学站)’. 괜스레 학교 앞을 지나던 중국인 학생에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떼는 말이야, 학교 이름으로 된 역은 없었단다…’
한단로(邯郸路). 푸단대학 정문 앞 단정히 뻗은 캠퍼스 길,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길 위의 나를 떠올린다. 12년 전, 수업 가던 발걸음. 무거운 캐리어에 꿈 한가득 싣고 온 한국 유학생은 그날의 햇살만큼이나 생생하게 다가왔다.
정문 근처에서 쉬어가던 벤치, 수업 들었던 강의실, 입학 면접을 봤던 건물, 자주 가던 편의점과 학생식당, 그리고 정든 기숙사까지. 나는 자전거를 빌려 돌아다녔다. 바퀴가 구르는 길을 따라 추억이 쏟아졌다. 중국 친구가 소개해줬던 만두집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똑같은 간판, 비슷한 맛, 주인아주머니는 날 기억하진 못했지만 따뜻한 미소는 여전했다. 늘 시켜 먹던 만두 한 입에 다시 그 시절의 나를 더 가까이 마주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익숙한 그곳과 낯설어진 나. 언젠가부터 나는 너무 조심스럽게 살고 있다. 말, 표정, 생각, 심지어 꿈조차도. 내가 아니라 '괜찮아 보이는 누군가'처럼 살아야 할 것 같은 압박 속에서.
그런데 이곳에서 다시 마주한 나는 달랐다. 그땐 시행착오도 많았고 어리숙했으며 외로움도 컸지만 눈빛만큼은 단단했다. 불확실한 내일을 두려워하기보다 기꺼이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다시 여기서 마주한 건 도시뿐 아니라 그 안에 머물고 있던 나 자신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여행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그건 반가움도, 향수도 아닌 돌아오지 않고서는 알 수 없던 마음이었다.
왜 다시 여기일까?
그때 나는 서툴렀지만 낯선 세계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딜 줄 알았다. 다시 마주한 이 도시, 상하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기억과 감정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과거의 내가 남겨둔 마음을 하나씩 주워 담으며 다시 나를 믿기로 한다. 누가 정해놓은 길이 아닌 내가 만들어갈 길로 향하는 다음 여정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