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을 지운 교실,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못하는 사회
이제는 서울대생이 다시 수능을 봅니다.
공대를 다니다가 말합니다.
“나는 실패한 의사예요.”
의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울대생조차 자신을 ‘패배자’라 규정하는 시대.
우리는 지금, ‘성공’의 정의가 단 하나만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보다 진로표에 적힌 학과 이름이 먼저 평가받고,
아이의 삶보다 입시 전적표가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개성? 취향? 적성?
그건 사교육 설명회에서 “불안정한 미래”로 분류됩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1타가 주도하는 사회’입니다.
모두가 1타 강사를 좇고,
1타 강의에서 밀리면 불안해지고,
아이에게도 묻습니다.
“넌 뭐가 되고 싶니?”가 아니라,
“너, 1등은 할 수 있겠니?”
초등학생을 위한 ‘의대반’이 생기고,
‘반수를 위한 수학 교양 수업’이 서울대 인기 강의가 되며,
‘재수 전용 프리미엄 학원’의 합격자 수가 입시 시장을 지배합니다.
2023년 정시 합격자의 80%는 재수생 이상.
서울대 자연계 학생 다수가 의대를 목표로 수능 재도전 중.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대 로드맵 설명회’가 성황리 진행 중.
이건 단지 교육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사회의 기준 자체가 병들어 있다는 징후입니다.
지금 이 사회는,
다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가졌든,
세상의 부조리에 민감한 감수성을 지녔든,
의대가 아니면 “위험한 길”로 낙인찍힙니다.
그리고 이런 문화 속에서
아이는 조용히, 자기 자신을 포기해갑니다.
이건 ‘인지적 혐오(cognitive contempt)’입니다.
다름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다름에 대한 우월의 시선과 경멸이
교육 현장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똑똑한 아이 = 의대에 간 아이”
“노력한 아이 = 성적이 높은 아이”
이 공식에서 벗어나면,
아이는 ‘게으르다’, ‘부족하다’는 낙인을 조용히 뒤집어씁니다.
한국 사회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함정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구조는 공정해 보이지만,
출발선부터 불평등한 사회에서
‘노력’은 자주 불공정의 은폐 장치로 작동합니다.
아이에게는 기회보다 부담이 먼저 가고,
“네가 못한 건, 네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아주 조용히, 그러나 깊게 아이의 자존감을 갉아먹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질문을 꼭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몇 등이길 바라십니까?"
혹은, “그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문제는 부모도, 아이도, 교사도
이 시스템 안에서 공범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이 구조의 무력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건 더 이상 무지가 아니라,
구조화된 무기력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멈추지 않습니까?
교육은 결국 '사람'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 아이가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
그게 교육이어야 합니다.
1등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그게 부모교육이어야 합니다.
“이 아이는 몇 등을 할까?”가 아니라,
“이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도 줄을 서지만,
아이는 지금도 존재를 잃고 있습니다.
교육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이 글은 ‘개성 없는 사회가 길러낸 인간의 얼굴’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 글이 삶을 다루는 당신의 시선에
한 줄의 질문으로 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