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 과잉과 회복 탄력성, 그리고 부모의 불안에 대하여
한국은 긴 시간
생존 중심의 가족 구조를 가졌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유교 문화,
그리고 산업화, 입시 중심 사회까지.
부모와 자녀는 ‘정서적 개별체’가 아니라,
서로의 생존을 책임지는 동맹 관계였습니다.
아이의 성공은 곧 부모의 생존,
부모의 보호는 곧 아이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아이가 울면
“너 그러다 대학 못 간다”라는 말을 먼저 꺼냅니다.
감정보다 결과,
회복보다 성취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아이의 감정에
진심으로 묻기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넌 지금 어떻게 할 건데?”
“너 기분 나빠도 할 건 해야지.”
“마음은 마음이고, 결과는 결과야.”
하지만 그 말을 되돌려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
결과가 더 중요해.”
이건 개인의 태도라기보다
한국 사회의 정서 구조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공감’보다는 ‘조절해야 할 것’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감정은 흘러야 할 것이 아니라,
통제되어야 할 ‘불편한 감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아이는,
슬퍼도 우는 법을 잊어버리고,
어떤 어른은,
기뻐도 기쁜 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알렉시타이미아(Alexithymia)라고 부릅니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인식하고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그런 어른이 된 데에는
사회 전체의 정서 문화가 배경에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질문받지 않고 자랐습니다.
“기분이 어때?”라는 말보다
“숙제 다 했어?”를 더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감정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관리 대상’으로 다루어졌고,
결과는 곧 존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말합니다.
“감정은 인간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드러낸다.”
감정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고,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감정을 무시한 삶은
‘의미’를 잃고,
결국 무감각한 성공만을 남깁니다.
한 청소년이 상담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이 없어요.
그냥 해야 할 일만 남은 것 같아요.”
이 아이는 아픈 것도 아닙니다.
공부도 잘합니다.
성실하고 책임감도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다는 느낌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이에게 감정을 묻는 일은
그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슬픔을 말할 수 있게 하고,
두려움을 숨기지 않아도 되게 하고,
기쁨을 표현해도 되는 공간을 주는 것.
그게 바로
정서적으로 안전한 가정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부모는
감정보다 성과를 말하고,
위로보다 조언을 먼저 꺼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 또한 감정을 말해본 적이 없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이를 키우면서
처음으로 인간의 감정에 대해 배우는 중입니다.
그러니 아이가 불안해할 때
억지로 안심시키려 하지 마세요.
무섭다 말할 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눌러주지 마세요.
그저 이렇게 말해주세요.
“그래, 무섭구나.”
“엄마도 그럴 때 있어.”
감정을 바꾸려 하지 말고,
그 감정이 머물 공간을 주세요.
그게 공감입니다.
감정은 통제하는 게 아니라,
흘러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흘러야 지나가고,
흐를 수 있어야 회복됩니다.
감정을 말할 수 있는 아이는
인생을 다룰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랍니다.
감정을 묻는 부모는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되었기에
이제야 마음을 배웁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저 지식을 주는 일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를 함께 배우는 여정입니다.
부모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이 글은 '감정을 잃은 사회가 길러낸 인간의 얼굴'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 글이 삶을 다루는 당신의 시선에
한 줄의 질문으로 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