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집착 시대의 불안한 교육
“오늘도 아이를 위해 책을 샀습니다.
읽다 보니, 또 제 탓이더라고요.”
제 주변 부모님들, 그리고 제게 메시지를 주시는 분들이 종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처음엔 아이를 바꾸고 싶어서 책을 찾습니다.
그런데 몇 장 넘기다 보면, 결국 문제는 ‘나’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문장들, 이런 식이죠.
“당신이 변해야 아이가 변한다.”
“아이의 성장은 부모의 거울이다.”
“지금 행동이 아이의 평생을 좌우한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저 역시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시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저는 그 말들이
부모를 얼마나 외롭게 만들 수 있는지도 함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성장을 강요당하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부모는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해,
아이도 더 뛰어난 아이가 되기 위해,
오늘도 성과의 계단을 오르고 있습니다.
‘자기 계발서’라는 이름으로,
‘에듀테크’라는 포장으로,
‘똑똑한 육아’라는 말로
우리는 아이와 자신을 조금씩 갈아 넣고 있습니다.
책 한 권을 펴면,
결국은 내 책임이라는 말이 기다리고 있고,
육아 영상 하나를 보면,
또 내가 부족하다는 말이 나를 찌릅니다.
실패한 건, 덜 노력했기 때문이고
아이가 힘든 건, 내가 덜 성숙했기 때문이며
성장이 더딘 건, 내가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들.
그 모든 비난을 ‘책’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내고 있는 건,
아이와 부모입니다.
요즘 부모님들은 '성장'에 진심입니다.
아이가 감정을 잘 조절했을 때,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을 때,
“우리 아이 달라졌어요!”라는 말에 희망을 걸고
또 다른 책, 또 다른 강연을 찾습니다.
그 여정은 아름답고 숭고하지만,
문제는 그 여정이 '끊임없는 성과'로만 측정될 때입니다.
아이에게도, 성장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날은 그냥 멍하니 있어도 괜찮고,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말합니다.
“지금 멈추면 뒤처져.”
“초등이 골든타임이야.”
“이 시기를 놓치면 평생 고생한다.”
교육경제학자 제임스 헤크먼(James Heckman)은 조기 개입이 장기적인 사회적·인지적 성과에 긍정적이라는 ‘조기투자 이론’을 제시했지만,
우리 사회는 이 개념을 불안 마케팅으로 오용해 왔습니다.
‘골든타임’은 아이의 삶을 여유롭게 열어주는 열쇠가 아니라, 조급함을 심는 자물쇠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부모는 불안에 쫓기고,
아이들은 무의식 속에서
‘쉴 틈 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사람’으로 자랍니다.
‘쉬면 안 된다’,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그런 생각이 아이의 안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아이는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감정을 눌러가며,
잠시의 멈춤도 불안해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마치 세상이 준 명령을 스스로에게 다시 반복하는 것처럼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내면화된 사회적 명령(internalized social injunctions)’처럼
외부의 조급함이 점차 아이의 마음 안으로 이식되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건,
이 모든 ‘조급함’이 아이 탓이 아니라 ‘내 탓’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아이에게 너무 퍼줬나?”
“너무 못 기다려줬나?”
“그때 그 말 한마디가 상처였을까?”
그렇게 자기 비난이 반복되면,
결국 부모는 ‘성장 강박’을 아이에게 더 심하게 투사합니다.
“넌 이 시기에 이 정도는 해야지.”
“엄마는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정작 그 ‘잘됨’의 기준은
사회가 정해준 모호한 성공 기준일 뿐입니다.
아이도 부모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외부의 프레임 속에서
스스로를 평가하고 조급해하며
서로를 다그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고 연결할 것인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양’이라는 개념도,
결국은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양은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연결할지를 아는 힘.
지적 허세가 아니라, 관계를 맺는 태도입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를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라 불렀습니다.
부모의 언어, 감정 태도, 일상 속 문화적 실천이
아이가 세상을 해석하는 감각이 되고,
그 자체가 교육의 출발점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아이의 결을 존중하는 부모의 태도에서
진짜 교육은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부모로서의 자기계발도, 아이의 성장도
결국은 조용하고 느리게,
‘나와 아이의 호흡’을 맞춰가는 여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는 결국 세상의 속도를 이기려 하기보다,
자신의 호흡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스크롤의 속도보다 느리게,
비교보다 관계에 집중하며,
자기 자신에게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부모는 그걸 가르치려 하지 않고, 먼저 살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교육입니다.
이 글이 당신의 시선에 단 한 줄의 질문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지금, 부모도 아이도 갈아 넣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교육을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