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더 다정해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법은 익혔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는 잊고 살아갑니다.
매일의 계획과 목표는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유는 점점 희미해집니다.
오늘은 그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보고 싶습니다.
“나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삶의 이유를 묻는 일은 어쩌면,
사랑의 의미를 다시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빠른 세상 속에서 잃어버린 질문
아이들은 점점 빠른 세상을 배웁니다.
하지만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취의 방법은 배워도, 존재의 이유는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새 ‘살아가는 법’을 알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삶은 단순히 숨 쉬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숨 쉬는가”를 묻는 과정입니다.
그 질문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죽음은 우리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를 위협하기보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되묻는 거울 같은 존재입니다.
그 질문 앞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현재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삶을 더 깊이 자각하게 만드는 시간의 경계였습니다.
죽음을 의식할 줄 아는 인간만이,
오늘을 진짜로 산다고 했습니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지금의 하루를 허투루 보낼 수 없습니다.
아이의 내일을 위해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가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의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의 의미는 고통을 없앨 때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이유를 발견할 때 생겨납니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단순히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의미란 거창한 사명이 아닙니다.
매일의 반복 속에서도 “이게 내 삶이다”라고 느끼게 하는 감각입니다.
부모 역시 아이의 불안을 없애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 불안을 함께 견디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삶은 완벽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에게 다가가며
조금씩 의미를 새겨 나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육심리학이 말하는 ‘공감의 학습’입니다.
삶의 의미를 묻는 부모는, 아이에게 ‘어떻게 공부할까’보다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한 번의 질문이, 아이의 배움을 성취가 아닌 성장을 향하게 합니다.
속도를 숭배하는 시대를 넘어
우리는 효율과 속도를 성공의 언어로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그 언어는 관계를 닫고,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교육은 지식의 이전이 아니라,
세대가 함께 의미를 찾아가는 문화의 대화여야 합니다.
빠른 세상 속에서 진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이해와 공감의 복원입니다.
공감이 회복될 때, 아이는 비로소
배움을 ‘경쟁의 무대’가 아닌 ‘성장의 여정’으로 느끼게 됩니다.
철학은 책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철학은 책 속에서 배우는 사유가 아닙니다.
아이의 눈물을 대할 때 잠시 멈추어 듣는 태도,
그 순간의 숨 고르기 속에도 철학이 있습니다.
부모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 자체가 곧 살아 있는 철학입니다.
아이 앞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상처 앞에서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 모든 장면이 아이에게는 ‘삶의 교과서’가 됩니다.
철학은 생각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그 태도는 하루의 대화, 한 번의 기다림,
그리고 한 번의 포옹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 깨어 있는 존재로
그래서 부모는 완벽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왜 살아가는지를 잊지 않으려는 사람,
그 이유를 매일의 행동으로 증명하는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삶의 의미는 정답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잘 사는 법’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왜 사는가’를 스스로 묻는 부모.
그 모습이야말로 아이에게 남는 가장 큰 유산입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사랑이 선명해집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결국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유한함을 자각할 때, 우리는 더 다정하게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삶은 답이 아니라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내는가,
그것이 곧 우리의 대답입니다.
오늘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이유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쩌면 그 대답이,
당신의 내일을 다시 시작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삶의 이유를 묻는 일은 결국,
사랑의 언어를 다시 배우는 일입니다.
삶의 이유를 묻는 부모가 늘어날 때,
세상은 조금 더 다정해질 것입니다.
교육이란 결국,
삶의 이유를 함께 찾아가는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103동 언니, 의대 교수 김성곤의
부모가 먼저 자라는 수업
Parenting Insights by Prof. Seong-Gon Kim
이 글이 부모와 아이의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되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