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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lab Jul 29. 2018

#73 한때 소중했던 것들

이기주 산문집 

#73 한때 소중했던 것들 

-이기주 지음 

혼자서 1h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반드시 상처를 남긴다.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한때 내 일부였기 때문이며, 나는 한때 그 사람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겨우 깨닫는다. 시작되는 순간 끝나버리는 것들과 내 곁을 맴돌다 사라진 사람들이 실은 여전히 내 삶에 꽤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지난날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p013






늘 그랬다. 행복과 기쁨은 인생의 절반만 가르쳐줬다. 인생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고르게 알려준 스승은 언제나 슬픔과 좌절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마다, '과연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이 조직에서 나를 지켜내야 하는가?' 따위의, 삶에 그나마 보탬이 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 같다. 물론 내 마음을 들여다볼 때마다 매번 정답을 찾아낸 것은 아니다. 운이 좋은 경우엔 정답이 아닌 해답에 가까운 것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답을 찾지 못하거나 답이 없는 문제임을 깨닫고 그냥 받아들이곤 했다. 그때마다 '아, 내가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p026



세월 앞에서 우린 속절없고, 삶은 그 누구에게도 관대하지 않다. 다만 내 아픔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꽤 짙고 어두운 슬픔을 견딜 수 있다. "모두가 널 외면해도 나는 무조건 네 편이 되어줄게" 하면서 내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p030



사랑은 본디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눈에 띄는 특정한 상대를 육안으로 분간해 서로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고,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심안을 크게 뜨고 서로의 내면을 살펴가며 심리적 거리를 좁힐 때 사랑은 움트기 시작한다. 여전히 나는 사랑이 어떻게 소멸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감히 말할 수 없다. 단지 사랑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해서만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상대방을 알아보는 데서 출발한다. - p033



오히려 사람은 실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반대인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요컨대, 남보다 쉽게 잘 웃는 사람은 남보다 많이 울어본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평소 별일이 아닌데도 남보다 희맑게 미소 짓는 사람은 남모를 아픔에 베갯잇 적셔가며 꺼이꺼이 울어본 사람일 수 있다. 한데 뭉쳐져 있는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우리가 어느 한쪽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p067



순수와 열정, 청춘과 젊음처럼 뜨겁고도 투명한 단어들은 '나이듦'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풍화를 견디는 일이다. 스스로 터득한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일이다. 삶이라는 비바람 속에서 한때 내 일부였던 것들이 몸에서 떨어져나와 수분을 잃고 가루가 돼 흩날리는 광경을 덤덤하게 바라보면서, 우린 그렇게 나이라는 것을 먹는다. -p072



인생에서 뭔가 선택한다는 것은 몇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 뽑는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에 한 점 미련을 두지 않고 내가 선택한 것에 최대한 집중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선택은 삶의 여백에 한 번 찍고 마는 점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으로 힘을 주어 긋는 선에 가깝다. -p075



내 안에 들어찬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문장을 다듬다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각자의 신념을 닮은 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마음속 깊은 곳, 은밀한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 터다. 꽃이 돋아나거나 묵은 잎이 떨어지기도 하고, 뾰족한 못이 박히거나 빠지기도 하는 나무가...-p086



우리는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하고만 
의미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특히 사랑은, 내 시간을 상대방에게 
기꺼이 건네주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운으로 사는 게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린 의기소침한 누군가에게 '기운 좀 내'라고 말하지만, 정작 삶을 이끄는 것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이 아닐까 싶어요." -p110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 법한 일이 있다. 그저 세월이라는 망각의 강물에 떠내려가도록 방치해야 하는 일들이. -p133



별것도 아닌데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말이 있다. 평범한 얘기 같은데 마음을 사정없이 후벼파는 말이 있다. 표현이 뾰족해서가 아닐 것이다. 말에 담긴 속뜻이 삶의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 진실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하지만, 마음속을 싹 도려내거나 요란하게 들쑤셔놓기도 한다.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늘 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 -p140



가슴에 사연 하나 품은 채 삶의 무게를 견디다보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갈래의 길을 걸어야 한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길을 걷기도 한다. 절대 가선 안 되는 길로 접어들 때도 있고, 꼭 가야만 하는 길 앞에서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도 한다. 여기서 '꼭 가야만 하는 길'은 본성의 길이다. 본성의 길이란 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과 기질이라는 돌들이 깔린 길로, 어쩔 수 없이 이끌려 빨려들어가는 길이다. -p147



소중한 사람이나 존재는
우리 곁을 떠날 때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소중한 무언가를 내게 남겨둔 채 떠나거나 
내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떼어내 가져간다. 



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사람과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 모든 관계는 인연의 결과인지 모른다. 살아가면서 우린 수많은 인연을 맺고 또 반대로 풀어야 한다. 다만 어떤 인연은 쉽게 종결되지 아니한다. 마지막 순간, 쉽게 뒤돌아서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 뒷걸음질해야 겨우 멀어질 수 있는 인연이 엄연히 존재한다. -p181



쉽게 잊을 수 있는 사랑은 없다. 그저 높다란 빌딩이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려버리는 것처럼, 하나의 사랑이 다른 사랑을 덮으면서 서서히 옛사랑을 잠식해가는 것일 뿐, 세월이라는 파도에 마모되면서 기억의 두께가 엽어지는 것일 뿐이다. 무겁디무거운 미련을 한 움큼 쥔 채 누군가를 기억에서 덜어내는 일이 아프고도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 188



소중한 무언가를 읽어버리는 일은 한때 내게 속해 있던 것이 아득한 곳으로 떨어져나가는 일과 같다. 마음의 일부가 찢어지는데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 내게 이별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호칭이 소멸되는 일인 것 같아요"하고 답하겠다. 서로의 입술에서 서로의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 우린 누군가와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덧없이,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 -p197



끄트머리, 라는 단어에는 끝이 되는 부분이라는 뜻말고도 일의 실마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끔은 과거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생각과 감정의 속살을 직시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거나, 답이 없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삶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희망은, 양지와 시작과 미래가 아니라 음지와 끝과 과거에서 생겨난다. -p209



살아가는 일은 울음을 터트리는 일과 닮았다. 울음은 의도하지 않은 순간, 불쑥 솟구친다. 멈추고 싶다고 해서 쉽게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살아지는' 혹은 '살아내는' 일도 그러하다. 삶이라는 실타래는 속절없음이라는 가느다란 실로 구불구불 뭉쳐 있다. 인생도 눈물도 그렇게 속수무책인 것이다. -p221



살다보면 명백히 늦었음을 절감할 때가 많다. 세월 속으로 저무는 것들을 아무 저항 없이 넋 놓고 바라봐야 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방송인의 어록처럼, 늦었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늦은 건지도 모른다. 다만 세월이라는 강물 위로 소중한 것이 떠내려갈 때 애써 손을 뻗어 움켜쥐려 하기보다, 강물이 그것들을 잘 실어나르도록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 시간은 늘 새로운 물결을 몰고 온다는 것을, 인생의 하류로 쓸려 내려가는 것들은 갈수록 늘어가지만 내 뜀박질은 점점 느려지고 있음을, 그리고 무언가를 마음에 담아 온전히 간직하려면 온전히 떠나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p232



마침내 봄이구나, 싶었다. 봄은 늘 이런 식으로 다가온다. 봄은 아득한 곳에서 손으로 만져지는 곳으로, 기억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기억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곳으로, 등불처럼 환하게 번지며 건너온다. 나는 완연히 봄 풍경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거나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순간 속에 그냥 머물고 싶었다. -p235






시옷으로 시작하는 단어 중에 아름다운 단어가 많다. '사랑이 그렇고 '숨결'이 그렇고 '숲'이 그렇다. 특히 난 "숲"하고 발음하는 순간, 숲을 걷는 상상에 잠기곤 한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숲'에선 바람 소리가 들린다. 거기엔 나무의 이파리와 이파리가 부대끼는 소리가 농밀하게 서려 있다.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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