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lab Jan 24. 2016

방 안에서 책 읽기

#4 우물에서 하늘 보기

세상은 변하고 한 푼이라도 벌어 먹고 살자면 알아야 하는 게 참 많다. 그러다보니 무엇을 읽거나 공부한다는 것은 '생계에 도움이 되는 선'을 지키기에도 버겁다. 학부 전공을 말하면 70~80년대 학창시절을 보냈을 법한 정년을 앞둔 세대는 여럼풋한 환상을 얘기하고, 또래 세대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공이 그러했기에, 학생의 본분을 지키는 것은 현실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시나 소설을 읽고 평하는 것이었다.


#4 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 지음

시간 죽이기에 좋은 책 / 2h



개인적으로는 문학이라는 것들을 '해석'한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첫 번째로는, 해석이 필요할 만큼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라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하는 생각 때문이다. 문학이라는 것이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라면 적어도 쓴 사람의 의도대로 읽는 사람이 읽거나, 쓴 사람의 의도는 차치하고 읽는 사람이 읽고 싶은 대로 읽는 게 맞지 않겠는가. 제3자의 해석이 필요하다면 그 이유가, 제3자가 '글을 쓴 사람'을 대변하겠다는 것인지, '자기가 이해한 대로' 또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고 싶다는 것인지, 혹은 읽는 사람이 자기 혼자서는 이해하기 어려우니 제3자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이든 낭비인 것 같다.


두 번째로는, 해설서를 읽을 때면 이상하게 '강요 받는' 느낌이다. 읽는 순간의 기분에 따라 어떤 감정선이 더 부각되어 읽히기도 하고, 어떤 역사적 사실이 눈에 더 들어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해설서를 읽을 때는 현재의 감상 따위는 개입할 여지 없이, 작자의 의도였는지 해설자의 의도였는지 알 수 없는 키워드들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때로는 이러한 해설서가 작품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는 글을 몇 번이나 곱씹어 읽은 후에야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싫은 이유는 중고교 국어 시간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동그라미 치고, 해설을 달고...


여하튼, 친구들과 함께 읽자 선택한 책이었기에 읽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책이지만 다 읽고 난 후에는 그다지 싫지 않았던 책이다. 해설서라기보다는 시 에세이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오래간만에 '유용성'이나 '효율성'과 연관되지 않은 종류의 책을 읽었더니, '이런 책 자진해서 뽑아 볼 수 있을 정도면 여유로운 삶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잊혀도 이 슬픔의 형식은 잊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문학이 늘 그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부적이다. 그러나 이 부재의 형식조차도 지금 우리에게는 사치가 아닌가. 형식을 말하기에 우리의 현실이 너무 비천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마주한 것은 죽음의 운명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악이기 때문이다. - p 98


일상에서 이렇듯 지나치게 진지하고 쓸데 없이 사적인 글을 접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잭웰치의 마지막 강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