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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lab Jan 31. 2022

#120 자기 돌봄

#120 자기 돌봄 

- 타라 브랙 지음, 김선경 편, 이재석 역 




주위 사람들은 나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럴수록 나는 더 깊은 외로움과 우울, 슬픔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나'인데, 왜 이리 힘들고 괴로울까, 나의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나는 그 고민에 매여 마치 안갯속을 헤매는 듯했다. 



욕망은 바라고 원하는 것이다. 그 욕망은 비 온 뒤의 죽순처럼 쉬지 않고 돋아난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거기서 우리는 좌절하고 괴로워하고 절망한다. 자신을 탓하며 원망하기를 반복한다. 부처는 완전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깨달으라고 한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스스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며, 모든 욕망과 괴로움, ㅗ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자기 돌봄은 잠시도 생각이 끊어지지 않는 내 마음이 엉뚱한 곳으로 달아나 나를 괴롭히지 않도록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나를 괴롭게 하는 생각의 쳇바퀴를 멈추고(멈춤), 순간순간 깨어있으면서 내 마음을 관찰하고(깨어있기, 마음챙김), 진짜 '나'를 인식하여 (통찰), 마침내 나를 사랑하고 온 세상을 껴안기(포용,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때 느끼는 낯섦과 불안, 불만, 부정, 허전함은 내 본래의 가슴, 편안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일종의 향수병이다. 향수병은 태어난 집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다. 본래 순수하고 고요하고 평안한 존재로서의 '나'가 바로 나의 '집'이자 '고향'이다. 그 집을 잃어버리거나 너무 멀어졌을 때 우리에게는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일어난다. 



달라이 라마의 그 말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자신의 가슴과 자각의 힘에 대한 신뢰', 달라이 라마는 우리가 인생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명상을 신뢰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한다면 내 삶을 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나 자신에게 '깨어있는 마음'의 능력과 함께 '깨어있는 가슴'의 능력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를 '분리된 자아'로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이렇게 분리된 자아가 갖는 기본적인 기분은 두려움이다. 무언가 결여되어 있거나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속에는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반드시 사라진다는 죽음의 필연성에 대한 불안이 자리한다.   



결국 '분리된 자아'라는 감각은 점점 강화되고 즐거움, 쾌락을 붙들려는 쾌락 또한 강해진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하룻밤에도 열 번씩 깨어 주변 환경을 살핀다고 한다. 뭔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위험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확인이 끝나면 다시 잠에 빠진다. 이렇게 기민하게 깨어있는 것은 진화의 결과다. 생명체는 늘 위험속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긴장을 늦추지 않고 깨어있어야 목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기 위한 우주복들이다. ... 그 가운데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우주복' 전략, 다시 말해 우리를 부족함의 느낌에 계속해서 가둬놓는 가장 기본적인 전략은 바로 '판단'이다.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대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한층 가깝게 다가선 것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이들은 대부분 어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 본래적인 자기 속으로 침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다. 그들은 너무나 조건화된 삶을 살아간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라고, 이루어야 하고, 가져야 하고, 해결해야 하고, 채워야 한다.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는 삶 속에서 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즉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부처는 우리가 겪는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여기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우리의 집은 본성이다. 그 집은 내면에 있다. 자신이 몸에서, 가슴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온전히 '집'에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데서 우리는 괴로움을 느낀다. '집'을 떠난 우리는 괴로움에 대처하는 자기만의 전략을 세운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닌 지금과 다른 삶을 원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하고 그로부터 떠나 있게 된다. 다음에 맞을 시간, 즉 내일은 지금 이 순간에 갖지 않은 무언가를 갖고 있기를 기대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본성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우리 안에 있는 황금을 잊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 가면 속의 '나'를 모른 채 가면을 '나'라고 믿으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진정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우선 멈춰야 한다. 그것은 생각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각하는 것이다. 자각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상태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을 확립하는 것이 좋다. '좋아, 지금 이 순간 깨어있겠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보라, 그 순간 나 자신의 내면과 진정한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깨어있기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이다. 



살아있음, 현존을 위한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식하는 것이다. ... 자연스러운 현존의 두 번째 성질은 받아들임이다. '받아들임'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저항하지 않고, 바꾸려 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R.A.I.N에서 R은 '인식한다 Recognise'이며, A는 '허용한다 Allow'는 뜻이다. 여기서 안식과 허용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마라. 단지 '아, 지금 여기에 뭔가가 일어나고 있군. 좋아, 그냥 이대로 내버려두겠어.'라는 정도로 충분하다. 



시작점이다. 나의 어딘가 막혀 있는 부분을 인식하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이다. 때로는 단지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만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그것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마음속에 일정한 공간과 자유가 생긴다. 



그러나 종종 마음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을 때, 그리고 우리를 찾는 손님이 너무 자주 찾아와 정말로 꼼짝없이 우리를 휘어잡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RAIN의 'I'로 나아가야 한다. 'I'는 조사하다, 살피다 Investigate의 머리글자다. 즉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살펴보고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I는 다른 뜻으로 친밀함 Intimacy를 의미한다. '친밀한 주의'다. 



그것을 인식하고 나면 '나'와 느낌들을 분리하게 된다. 즉 내가 지금 여기 '현존'하게 되면 나와 감정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RAIN의 마지막 글자 N은 '동일시에서 벗어나기 Non-identification'를 의미한다. 




잠시 멈춤, 직시, 직관, 바라봄 그리고 받아들임, 그러고 나면 그다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지 여유가 생긴다. RAIN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생각은 현재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잠시도 쉬지 않고 코멘트를 붙인다. 한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연쇄적으로 불러일으킨다. 끝없이 이어지는 코멘트를 따라가다 보면 '나'는 사라지고 없다. 생각의 주체인 '나'는 생각에 끌려다니다 길을 잃는다. 매 순간의 경험에 진실하게 머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실재를 제대로 살지 않고 어떤 이유로 피하고 외면하고 도망가는 경우 우리의 내면에는 깊은 상처가 생긴다. 상처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몸 안 어딘가에 쌓인다. 상처에 대해 스스로 무감각 해지기 위한 에너지들이 모이는 것이다. 치유는 이 상처를 건드리고 어루만지는 과정이다. 상처가 두렵고 부끄러워서 혹은 끔찍해서 묻어둔 것을 꺼내 보며, '살지 못한 삶'을 다시 사는 것이다. 



살지 못한 삶으로 생긴 고통을 잊기 위한 보상으로, 혹은 그것을 외면하기 위해 우리는 '잘못된 도피처'를 찾게 된다. 우리 자신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한 것이면 무슨 일이든 하고, 무엇이든 가지려고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해주고 좋아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또 내면의 깊은 상처를 성공적으로 감추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잘못된 도피처가 있다. 바로 '모든 일을 항상 올바르게 하려는 성향'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실수하지 않고 완벽하게 해내려고 한다. 어떤 선택의 순간에도 가장 효율적이고 완벽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생각을 거듭한다. 뭔가 잘못되지 않을까, 혹은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혹 잘못된 결정이라고 스스로 판단되면 거기에 집착해 후회하고 자책한다. 그것은 일상의 아주 작은 일에서도 일어난다. 



나 자신과 싸우는 가장 흔한 형태는 비난 퍼붓기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비난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불안감을 느낄수록 우리가 속한 문화도 불안해진다. 불안한 사회일수록 개인을 무시하는 말과 행동이 더 만연하게 되고 '판단과 비난'은 일반적인 의사소통 방식으로 굳어진다. ... 우리가 타인에 대한 비난을 퍼붓기 전에 '이 판단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느낌을 정당화하려는 욕구다.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가고 싶은 잠재된 생각이 나의 생각과 말,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모든 갈등과 반목의 이면에는 상대와 나, 모두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는 마음이 깔려 있다.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전략을 동원한다. 스스로를 방치하기도 하고 세상에 반항하며 거칠게 살아가기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악의 없는 전략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다. 사회의 기준에 순응하고 타인을 기쁘게 하고 그로 인해 자기만족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로 '자기 계발'이라는 트렌드다. 



어쩌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훌륭한 프로젝트(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기 위한 계획)'를 세워놓고 살아가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 프로젝트는 '좋은 엄마', '능력 있는 직장인', '타인을 도와주는 사람', '훌륭한 인격자'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향상하려는 노력에는 '지금 나는 부족하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이대로는 안돼. 달라져야 해.'라는 보이지 않는 조건이 전제된다. 



다시 말해 1차적 수치심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과 감각을 말한다. ... 이는 불교에서 화살을 맞는 것에 비유한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괴롭고 성내고 분노하는 느낌이 첫 번째 화살이며, 그와 같은 감정에 부림을 당하고 끌려다니는 것이 두 번째 화살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하나의 화살만 맞고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 것처럼, 그런 때를 당해 오직 몸의 느낌만 일으키고 마음의 느낌은 일으키지 않느니라. "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저 인식하고 허용하는 것이다. 지금 내 가슴과 몸에서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마치 가슴에 손을 얹듯이 친밀한 주의력과 친절함으로 잠시 품어 안아 보라.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열리고 더 큰 현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생각은 우리가 물리쳐야 하는 적이 아니다. 마음에서 생각을 모조리 몰아낼 필요가 없다. 다만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생각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지 않고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는 능력을 계발하면 된다. 



현존의 감각을 깊게 만드는 데는 두 가지 질문이 도움이 된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일어나고 있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 허용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도 틈틈이 이 질문을 떠올리며 잠시 멈춰보라. 몸에 익으면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감정에 쫓겨 헤매지 않는다. 오롯이 그 현실에 집중할 수 있으며 지혜로운 선택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비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니사르가다타의 말처럼 우리는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 무엇이 가장 완벽한 사랑일까.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바로 주의(관심)다. 



바다는 곧 우리의 본성인 '존재성Being-ness'을 카리킨다. 바다에서 생성되는 파도는 우리가 느끼는 흥분과 두려움, 고통, 즐거움, 생각, 분노, 행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존재성 혹은 전체성에 대한 감각이 오로지 협소한 파도에만 집중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고통이 일어난다. .... 치유는 바로 지금 '깨어있기'를 통해 파도를 잘 맞이하도록 이끄는 과정이다. 치유의 시작은 멈춤이다. 



멈춤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서양 긍정심리학자들은 트라우마를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경험해야 진정한 치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트라우마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을 '새로운 자원resource'으로 다시 경험하지 않으면 트라우마는 살면서 계속 반복되고 오히려 더 강화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워크홀릭(일중독자)이 된다. 있는 그대로 괜찮지 않은 자신을 열심히 일함으로써 보상받으려고 한다. 우리는 불안과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느끼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많이 먹는다. 또 우리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인정하지 않기 위해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휴식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잠시도 가만히있지 못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마음챙김은 우리 스스로에게 휴식을 선물하고 지금 현재를 일깨워준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은, 나 자신에 관하여 잘못된, 혹은 제한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 믿음은 외부의 어떤 기준에 맞추는 데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마음챙김 수련회'에 와서 깨닫는 것 중 하나가 '나의 생각을 반드시 믿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반드시 굴복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의 생각을 믿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가르침 중 하나다. 



생각을 다루는 세 번째 단계는 자신의 신념과 믿음에 대한 진지한 탐구다. 이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 신념은 내 생각의 중심이며 지금 나의 현실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신념이나 믿음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 생각은 원하지 않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제한된 신념과 잘못된 믿음은 비극의 씨앗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매 순간을 언제나 감싸고 있는 창조성과 가능성을 앗아 가 버린다. 삶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고 재미있고 즐겁고 창조적으로 펼쳐질 수 있는데 잘못된 믿음이 그 가능성을 단단히 막아버리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지금과 다른 방향으로 접어들 수 있다. 



인간만이 트라우마를 건강한 방식으로 소화하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은 똑같은 장면을 반복 상상하면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재생시킨다. 바로 '싸움-도망 반응'이다. 더 큰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그 충격을 최소화시키려는 하나의 방어 전략인 셈이다. 



지금 나의 삶을 친밀하게 돌보는 연습이 바로 '명상'이다. 친밀해진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생각에서 깨어 실재의 삶 곳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물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매우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그러나 떠오르는 생각을 그야말로 생각 없이 좇다 보면 우리 머릿속엔 여지없이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고요한 곳을 찾는다. 인적 없는 바닷가와 숲 속, 한적한 오솔길 등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지칠 때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고요한 장소는 도피처다. 고요한 장소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그곳에서 안전과 평화를 느끼기 때문이다. 



자애는 사랑보다 깊은 사랑, 한량없고 조건 없고 한계가 없는 어머니와 같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 사랑을 먼저 나에게 비추며 마음을 열게 하여, 순간에 깨어있도록 하는 모든 명상과 방법을 자애 명상, 메타 Metta 명상이라고 한다. 



단지 지금 여기, 현재를 알아차리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마음 상태를 적극적으로 계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 자애와 인내의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다. 메타 수행은 마음챙김 수행과 마찬가지로, 우리 뇌에서 긍정적인 감정과 관련된 부분을 활성화시킨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 또 타인에 대한 두려움 없이, 타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대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대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내가 만들어낸 비현실적인 타인으로 변한다. 실재 속에 살지 못하는 우리는 연극 무대 위의 가짜 배우가 되어 상대와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용서는 상대의 나쁜 행위에 대한 특정한 이야기를 내 안에서 놓아버리겠다는 것,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똑같은 상처가 다시 저질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결심하겠다는 의지다. 나의 주도적인 행동이 담겨야만 진짜 용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용서'란 단지 용납이나 수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안다. 또 용서는 절대 강요할 수 없다. 섣부른 용서는 자기기만, 회피, 자기부정일 뿐이다. 




용서는 매우 점진적인 과정을 거친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먼저 용서한 다음에 타인에 대한 혹은 그 일 자체에 대한 용서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용서는 '나는 괜찮다.'는 자기 상처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생긴 뒤에야 시작할 수 있다. 



아프리카 쿠족의 전통적인 용서법의 핵심은 기다림이다.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한 뒤 가슴속의 선한 에너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멈추고 진정으로 주의를 기울일 때만이 진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나 자신과의 우정을 발전시킬 수 있다. 멈춤 그리고 주의를 기울임, 집중, 그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이 질문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물음에 대답하는 순간, 바로 이 순간을 직시하고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살아내겠다는 의지, 매 순간 나의 살밍 잘못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말이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가슴의 위대함은 삶을 품어 안을 수 있을 만큼 넓고 깊고 크다. 



아프리카의 반투족 사람들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면 굿나이트 키스 대신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 "네 본연의 모습이 되어라. 본연의 모습이 되어라."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기를, 자기 모습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에게 주는 축복의 말이다. 자기를 잃지 않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현재 일어나는 현상에 이름을 붙여 관찰하면 뇌의 전두엽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이는 공간에 대한 감각, 자신의 경험과 관계를 맺는 감각을 증가시킨다. 이러한 깨어있기를 통해 우리는 '나'와 감정, 경험을 분리하여 생각하게 된다. '감정=나'라는 식으로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명상은 크게 '계속해서 돌아오는 것' 그리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둘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다. 결국 이 둘을 통해 우리가 터득하고자 하는 것은 머무는 것, 즉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불편한 것은 당장 피하고 고통은 없애고 외로움은 느끼지 않으려는 그런 '도망'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치유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기를, 나의 번뇌와 고통이 없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번뇌와 고통이 없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행복하기를, 번뇌와 고통이 없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도 행복하기를, 번뇌와 고통이 없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행복하기를, 번뇌와 고통이 없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심리학자 잭 앵글러는 영적 여정의 길 전체가 사실은 놓아버리는 과정,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놓아버리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삶의 여정은 다만 놓아버리고, 애도하고, 또 놓아버리고 애도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애도는 나에게 의미있는 대상을 상실한 뒤 마음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나의 경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며 현존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픔이 일어나고 있다.'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가 멕시코 주술사 돈 후앙에 대해 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의 왼쪽 어깨 너머에 있다." 우리가 죽음의 필연성을 자각할 수 있다면, 죽음이 언제나 우리의 어깨 너머에 있음을 기억할 수 있다면 삶은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사소한 것이라면 그냥 놓아버릴 수 있다. 



잘못된 사본을 습관적으로 답습하듯 많은 사람들이 생각의 습관을 좇아 살고 있다. 물론 이는 고통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부처가 고통을 강조한 것은 그것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이 아닌, 삶의 한 부분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스승은 자신의 주된 명상 중 하나는 '상대방의 선함을 볼 줄 아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상대에게 내재해 있는 불성, 본성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깊고 큰 선물이다. 



무엇으로부터 내쳐질 때, 세상이 나에게 아무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손을 뻗어 세상과 연결을 맺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내가 지금 고통을 받고 있구나, 소외감을 느끼고 있구나, 하는 때를 정확히 인식하고 단순하게,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땅을 건드리는' 것이다. 사랑이 존재하는 그곳을 떠올리고 그 사람의 품에 안기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흙탕물을 오래 두고 보면 맑고 투명해지듯 나의 본성은 맑은 물이다. 슬픔과 성냄, 불안과 상처, 고통의 흙탕물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면 나의 본성과 마주할 수 있다. 



우리는 내면의 삶을 무시하고 거부하고 모른척하는 오랜 습관에 젖어 있다. 아니, 그 사실 자체를 모르는 무지에 빠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무지와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순간순간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진실인가?"라고 물으며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친절하게 관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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