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뚜껑을 열면 호주 하늘과 바다가 있다

하루1000자

by 인문규

5월 중순, 여름의 비 냄새에 꽃가루가 아직 남아있어 코가 간지럽다. 아직은 쌀쌀한 새벽에 이불을 덮고 책상에 앉아 밀린 과제를 하고 있었다. 늦은 밤에 머리를 쓰고 있자니, 배가 고파져 안방으로 가서 간식통을 뒤적였다. 진라면, 오징어짬뽕, 신라면 등등 많이도 쌓여 있는 라면 사이로 짬뽕 왕뚜껑 하나가 눈에 띠었다. 1150원짜리 주제에 플라스틱 뚜껑에 비닐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포장을 뜯고 뚜껑을 열어보니 예전처럼 많은 면이 들어있었다. 라면 스프를 집어 면 위에 털었다. 새벽이라서 그런지 소리가 요란했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고 뚜껑을 닫은 뒤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서 빗소리를 들으며 왕뚜껑이 면이 익어가는 것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뚜껑 위로 손을 올려놓았다. 따듯했다. 뚜껑 사이로 라면의 짬뽕 냄새가 났다. 불맛이 살짝 가미된 짠내에 입안에 침이 고였다.

3분이 지나고 뚜껑을 여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뚜껑을 앞접시 삼아 라면을 떠받친 뒤 한 입 크게 삼킨다. 군대에 있을 때 먹었던 그 맛이었다.


2017년 봄, 나는 군대에서 병장이 되었다. 선임들도 대부분 말년이라 사회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 동기들 또한 각자 부대 내에서 자신의 몫만을 해내고 대부분 자기 계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도전했던 부사관을 3차까지 낙방하고 나니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몰라 한참 방황하고 있었다. 막막한 날들 속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독서와 새벽에 동건이와 함께 보급으로 나온 왕뚜껑을 먹을 때였다.

같은 생활관을 사용하는 동건이와 나는 입대 날짜는 2개월 정도 차이가 났지만 부대에서 6개월 동기제를 시행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동기로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두 살이나 많았고 원리원칙을 준수하는 편이라 군 생활도 곧 잘했다. 또한 다른 동기들에 비해 성숙해서 대화를 하다보면 가끔씩 놀라울 때가 많았다. 나는 그에게 군 생활이 힘들어질 때면 자주 상담을 했고 동건이는 부담 없이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런 동건이와 내가 병장이 가까워지고 새벽 당직을 맡을 무렵이었다.

우리는 사단 내에서 우선 선발 부대로 당직 근무 간에 부사관과 당직병이 같이 근무하는 날과 당직병 혼자 근무하는 날 이렇게 두 가지 형태로 근무가 이루어졌다. 동건이와 나는 서로가 1인 근무를 할 때면 항상 보급으로 나온 왕뚜껑 4개와 PX에서 미리 사온 햄과 냉동 음식을 가지고 같이 먹었었다. 야식이 맛있어서 자주 먹었던 것도 있지만 6시 이후에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부대 특성상 항상 밤이 되면 배가 고팠다. 당시에 병장 월급이 21만원이었기에 적금을 제외하면 이런 음식들을 자주 사먹을 수 없어서 보급라면으로 속을 채웠다.

동건이와 야식을 먹을 때면 그가 해외에 있을 때 이야기를 자주 해주곤 했는데 국내에서만 있었던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신기했다. 특히 동건이가 가장 오래 살았던 호주 이야기를 들을 때가 가장 재밌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생동감 넘치게 표정과 손짓으로 호주의 푸른 하늘과 바다를 묘사하고 친구들과 있었던 일화를 말해주곤 했다. 그 얘기를 할 때 군대에서 동건이는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말해주는 호주의 바닷물이 일렁이는 모습과 하늘을 상상해봤지만 내 기억 속에 제주도 바다와 하늘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전혀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이 있다는 게 마냥 좋았던 것 같다. 언젠가 전역을 하고 여유가 된다면 그곳으로 가볼 수 있을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좋았다. 전역을 하기 전까지 매일 그렇게 동건이는 말하고 나는 들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전역을 하고 3년이 지난 지금도 동건이와 나는 가끔씩 만나면 그때 그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리고 여전히 대화의 대부분은 동건이가 이끌어간다. 나는 옆에서 예전처럼 질문을 하거나 동준이가 원할 때만 내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어느덧 둘 다 20대의 중반이 되었고 각자의 목표가 생겨 나아가고 있다.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왕뚜껑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힘든 군 생활에서 왕뚜껑이 좋은 인연은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면은 다 먹고 국물만 남아있었다. 그릇을 양손으로 들어 왕뚜껑의 진한 국물을 들이켜 속 깊이 삼킨다. 호주의 짭조름한 바닷물이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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