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 사이로 느릿하게 눈을 떴다. 머릿속엔 하나의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제대로 쉬는 건 도대체 뭘까?” 흔히들 여행을 떠나야 충전된다고들 하지만, 나는 정작 비행기에서 내리던 순간보다 집 근처 조용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시간이 훨씬 더 평화로웠다. 그게 내 몸이 알려준 정답이 아닐까 싶다.
여행보다 더 깊은 휴식
패키지 여행으로 꼬박 3일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볼 것 다 보고, 사진도 잔뜩 남겼지만, 집에 돌아와 씻지도 못한 채 쓰러져 눕던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방전됐구나.’ 멋진 풍경과 낯선 골목이 주는 설렘은 있었지만—쉼이라기엔 내 호흡이 너무 가빴다. 휴식은 ‘해야 할 일정’이 없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나는 것 같다.
공원의 느린 산책, 가족과의 가벼운 대화
그래서 요즘 내가 택한 건 집 근처 작은 공원이다. 갈 때마다 풍경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새롭다. 아이들이 “엄마, 저기 개미 줄 봐!”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 ‘지금 여기’에 마음이 내려앉는다. 적당히 부는 바람, 나무 사이사이 흔들리는 햇빛, 옆에서 조잘대는 가족의 목소리가 섞이면, 하루가 고요한 음악처럼 흐른다. 그게 바로 내 휴식의 배경음.
멍때리기와 운동 사이의 균형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일부러 조금 돌아 걷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어느 순간 심박수가 조금씩 올라가고 뺨이 따뜻해진다. 가쁜 호흡이 차오를 즈음, 머릿속은 오히려 맑아진다. ‘운동은 노력’이라고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생각을 닦아주는 샤워” 같았다. 너무 힘을 주지 않고, 땀방울이 한두 개 맺힐 만큼만—그게 내 몸에 맞는 속도다.
글쓰기, 생각 정리하기, 그리고 낮잠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책상 앞에 앉는다. 모니터 대신 빈 노트를 펼치고 펜을 쥐면, 온갖 단어와 감정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글로 옮겨진 생각은 더 이상 맴돌지 않고 페이지 위에서 모양이 된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면, 잠시 꾸벅 낮잠이 찾아오는데—30분쯤 푹 자고 나면, 어떤 비싼 에스프레소보다 상쾌하다.
좋아하는 노래와 ‘흐트레칭’
오후엔 살짝 당기는 근육을 달래려 플레이리스트를 켠다. 가사 한 줄, 기타 리프 한 소절이 귀를 간질일 때 천천히 팔과 다리를 뻗는다. 요가 매트도 필요 없다. 거실 바닥에, 방금 나만의 무대가 생긴다. 음악에 맞춰 흐르듯 늘어나는 스트레칭―나는 이걸 ‘흐트레칭’이라고 부른다. 리듬에 몸을 맡기니, 힘이 아니라 유연함으로 버틴다.
배우고 싶었던 걸 배우기
쉼은 ‘아무것도 안 하기’만은 아니더라. 오래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온라인 캘리그래피 클래스, 소리 내어 읽기 연습, 짧은 외국어 회화 같은 것들—흥미만큼 가벼운 속도로 들여다본다. 억지로 숙제하듯 달려가지 않으니, 배움이 오히려 휴식이 된다. 새 기술 하나를 익히면 내 일상이 살짝 넓어지고, 작은 성취가 무심코 미소를 끌어올린다.
침대, 그리고 ‘좋은 삶의 질’
사실 이 모든 휴식의 출발점은 침대를 바꾼 사건이었다. 허리가 편안해지니 아침이 다르게 시작됐다. 충분히 자고, 기지개를 켠 뒤에도 피곤하지 않은 날이 늘어나자, ‘열심히’의 의미가 달라졌다. 잘 쉬는 게 곧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란 걸 몸이 먼저 증명해줬다.
그래서, 제대로 쉰다는 건?
속도를 늦추는 것 – 사람마다 박자가 다르니까, 내 템포를 찾는 일.
감각을 깨우는 것 – 바람, 향기, 음악, 땀방울 같은 작은 자극에 집중하기.
비워야 채워진다는 걸 믿는 것 – 잠, 멍, 낮잠, 글쓰기처럼 ‘멈춤’을 일과로 삼기.
억지로 하지 않는 것 – 재미와 흥미가 방향이 될 때 지속은 저절로 따라온다.
가족·몸·마음에 동시에 귀 기울이는 것 – 쉬면서도 사랑하고, 움직이고, 꿈꾸기.
이제 내 다이어리에 ‘할 일(To-do)’보다 먼저 적히는 건 **‘쉴 일(To-rest)’**이다. 오늘도 해냈다. 침대·공원·샤워·멍때리기·흐트레칭·낮잠—모두 체크.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을지 몰라도, 나는 분명 어제보다 더 단단해졌다.
내일도 다시 묻겠지. “오늘, 나는 제대로 쉬었나?”
그리고 다시 빈 칸에, 햇빛 한 조각만큼 가벼운 쉼표를 찍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