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풍납토성에 이어 위례성의 또 다른 반쪽, 몽촌토성을 거닐며 한성백제 답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풍납토성 남성벽 전망대에서 올림픽대교 남단교차로를 지나 몽촌토성까지는 약 700m쯤 됩니다. 여유 있게 산책하듯 걸어가면 어느덧 백제의 또 다른 왕성에 도달합니다. 지나는 길에는 칠지도를 본뜬 조형물도 하나 있는데. 아무래도 원본의 미적 감수성은 따라가지 못하는 듯합니다.
몽촌토성은 만신창이가 된 풍납토성에 비하면 아직도 그 견고함이 살아있습니다. 성에 오르려면 성내천이나 몽촌 해자를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해자란 성 밖에 파놓은 구덩이로 방어시설이죠. 지금은 시민들의 쉼터로 자리 잡은 ‘몽촌호’나 ‘88 호수’ 역시 1800년 전 백제 때 해자의 흔적입니다.
성의 보존 상태도 훨씬 좋습니다. 성 전체의 길이는 2.7km인데 다수 구간이 잘 남아 있습니다. 자연 구릉 위에 성벽을 판축 방식으로 쌓았는데 성벽의 높이가 상당합니다. 성벽에는 고목들이 여기저기 자라고, 해자 옆에는 개나리와 벚꽃, 순이 돋아난 버드나무가 하늘거려 별천지 같습니다.
아무래도 풍납토성보다 보존이 훨씬 이르게 진행됐기 때문일테죠. 올림픽을 앞두고 이 일대도 개발의 풍파를 비껴가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곳이 위례성 일수도 있다는 학계 주장이 받아들여져 공원 형태로나마 보존이 됐지요.
풍납토성이 평시에 왕과 관료가 머무르는 왕성이었다면, 몽촌토성은 방어 요새의 성격에 가깝습니다. 실제 성 내부에서 창날 덩어리나 뼈로 된 의례용 갑옷 등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성벽 일부 구간에는 토성에서 발견된 목책 일부도 복원되어 있습니다. 평지에 거대한 왕성이 있고 배후나 주위에 방어 목적의 성이 있는 것은 후대 백제 사비성이나 고구려의 평양에서도 보이는 도시 구조죠.
실제 성벽 일부 구간의 높이가 40여 미터는 되는 것이, 방어시설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아마 한성백제가 망하고 이곳에 들어온 고구려군과 이후 다시 한강을 점령한 신라군도 똑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풍납토성이 함락 후 버려진 것과는 달리, 몽촌토성은 군사적 요새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인지 고구려와 신라군이 주둔한 흔적이 제법 나오는 편이기 때문이죠.
특히 고구려군은 호로고루에 대형 집수시설을 만든 것처럼, 몽촌토성에서는 백제인이 깔아놓은 도로 구조를 이용해 그 옆에 대형 집수지를 만들어두기도 했습니다. 물이 귀한 골짜기와 초원에서 온 전사들답게 전장에서의 급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걸까요.
몽촌토성은 요새인 동시에 백제 왕실의 별궁 역할도 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성 시기의 별궁은 이곳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몽촌토성에서는 궁(宮) 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도 발견됐습니다. 2021년 한성백제박물관이 특별전에서 이를 최초 공개한 바 있지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위례성은 크게 북성과 남성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한강변에 자리 잡은 북성은 왕성으로 풍납토성, 남성은 별궁인 몽촌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다수설입니다. 북성과 남성, 그리고 그 사이의 성내천 일대 민가들이 합쳐져 백제의 ‘하남 위례성’을 구성한 것이죠. 실제로도 최근에는 풍납토성 바깥에서도 백제 민가의 흔적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풍납토성보다는 사정이 낫다지만, 몽촌토성에서도 백제의 흔적을 직관적으로 느껴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올림픽 공원 남쪽에 서울의 대표 시립박물관인 한성백제박물관이 있어 백제 역사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을 줍니다.
위례성에 거주한 왕성인들은 한강이 실어 나른 풍요와 서해를 통해 건너온 고급문화를 향유하며, 한반도의 문명 수준을 일진보시 켰습니다.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굴뚝 뚜껑이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발견된 하수도 배관이 단적인 증거입니다. 흙으로 된 수도관은 당시에는 고구려나 신라에서도 발견된 바가 없습니다.
중국의 고급 청자와 술과 음식을 끓이던 화려한 청동 초두(鐎斗) 등의 수입품은 기와가 올라간 저택에서 거주하던 백제 왕성인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했겠지요.
융성함이 물질적 영역에서만 그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제인의 정신문화에도 질적 혁신이 있었습니다. 지난 2019년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화장한 인골들이 대량으로 수습됐습니다. 백제에 불교가 도래하며 장례법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침류왕 때 멀리 인도에서 온 마리난타는 서해 뱃길로 위례성에 당도합니다. 인도의 고승이 설파한 불법으로, 백제인들은 한층 더 고차원의 철학을 접합니다. 한층 성숙한 백제인의 정신세계는 훗날 꽃 피울 화려한 백제 불교 예술의 사상적 토대가 됐습니다.
한성백제의 문화가 절정을 이루는 사이, 왕국의 북쪽 변경은 다시 소란스러워집니다. 고구려에서 불세출의 정복군주인 광개토왕이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성 별궁, 지금의 몽촌토성에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백제 17대 아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북방의 불안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본래 아신왕은 삼촌인 진사왕에 왕위를 찬탈당하고 왜로 도피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진사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거듭 패배하며 영토를 잃자 귀족들이 왕에 대한 신임을 거두게 됩니다. 아신왕은 자신에 우호적인 왜 호족과 백제 귀족의 도움을 받아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이미 한강 이북은 고구려군의 영향권에 들어간 상황이기 때문에 아신왕으로서는 외척인 진 씨 세력에 병권을 일임하고, 어떻게든 전선을 북방으로 밀어내야 했습니다. 광개토왕이 요동 정벌에 힘을 쏟는 사이 아신왕은 장인 진무 장군을 좌장으로 삼고, 북방 요새와 황해도 일대에 대한 군사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왕 자신도 징발한 군대로 직접 원정에 나섰으나 별 성과는 없었습니다.
이미 백제 진사왕 때 관미성과 석현성 등 백제의 서북방 요새를 모두 격파한 광개토왕입니다. 요동의 전선을 정리한 광개토왕은 396년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렸습니다. 그전처럼 단순한 전리품 약탈이나 거점 확보가 아닌 백제 왕성을 직접 타격하기 위해서입니다.
수군과 기병을 자유자재로 운용한 광개토왕의 용병술에 위례성 주변 방어선은 빠르게 무너집니다. 왕성이 포위되자 아신왕은 결국 광개토왕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광개토왕이 백제의 대신과 왕족 10인을 비롯해 백성 1000명을 끌고 가면서, 전쟁은 일단락됩니다.
유례없는 패전에 백제 조야가 함께 요동쳤습니다. 설욕을 위한 왕의 또 다른 전쟁 준비에 백성들이 먼저 이탈합니다. 삼국사기에는 398년 백성들이 전역(戰役)을 피해 신라로 도망쳐 호구(戶口)가 줄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도 403년 백제의 왕족으로 추정되는 궁월군이 120개 현의 인력을 데리고 왜로 귀화하기 위해 가야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백제 번영의 핵심인 농민층의 민력(民力)이 고갈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군과 가야군까지 동원한 황해도 공격을 성공시킨 것을 마지막으로, 아신왕의 전쟁도 끝이 맺습니다. 405년 왕 자신이 갑자기 사망하면서죠.
지배층이 동요하던 상황이니 내분이 당연히 이어졌습니다. 왜에서 돌아온 태자 ‘영’은 부여 출신인 해 씨 가문과 손잡고, 대대로 왕비족이었던 진 씨 세력을 누른 후 왕위에 오릅니다. 백제 18대 전지왕입니다. 전지왕 때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였습니다. 왕은 전쟁보다 중국 동진과 왜와의 외교에 전력을 집중하는데,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고립해 압박하겠다는 노선을 택한 것이죠.
전쟁은 피하고 우군은 늘려 고구려에 대항하겠다는 전략은 후대인 비유왕에게도 이어졌습니다. 비유왕은 특히 언변이 좋은 왕이었다고 합니다. 비유왕이 찾아낸 새로운 동맹은 바로 신라였습니다. 120년간 이어질 반고구려 공동 전선인 ‘나제동맹’ 체결에 성공한 것이죠. 신라 역시 400년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나라 전체가 고구려의 속국 신세로 전락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고구려라지만 대륙의 북위와 유연, 남쪽의 백제, 신라, 왜를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특히 고구려도 광개토왕의 죽음 이후 권력 다툼이 시작되며 한반도 중남부는 교착 상태 속 평화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나제동맹의 일등공신인 비유왕도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아신왕 이후 백제의 왕권이 흔들리면서 대귀족 들인 진 씨와 목 씨, 해 씨의 권력다툼이 이제는 왕실도 제어하기 힘든 수준에 달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왕마저 정쟁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下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