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이 정쟁에 휩싸이는 폐단을 바로잡고자 한 왕이 비유왕의 아들, 백제 21대 국왕 개로왕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누락되어 있지만 개로왕 역시 험난한 과정을 통해 왕좌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옛 마한의 왕족인 목 씨 가문과 손을 잡은 개로왕은 야망이 큰 군주였습니다. 아마 옛 조상 근초고왕이나 고구려의 광개토왕 같은 정복군주를 꿈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은 대업을 위해 왕권 강화가 필수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개로왕이 주목한 것은 왕족들이었죠. 개로왕은 흉노 등 북방민족의 관작인 좌현·우현왕 제도를 도입해 병권을 왕족에 집중시켰습니다. 마치 북방 유목제국의 칸들처럼 말이죠. 아울러 백제 왕족 다수에 내린 이런 관작을 다시 중국 송나라의 황제에게서 제수받도록 해 왕족의 권위를 더욱 높였습니다.
아울러 ‘편호소민(編戶小民)’ 즉 호적에 편입된 백성들을 징발해 거대한 토목공사 착수에도 나서게 됩니다. 앞서 둘러본 지금의 석촌동 일대 왕릉들도 정비했고, 한강 주변 제방과 방어 진지의 구축, 화려한 궁실 조성도 연이어 이어졌습니다.
전제 왕권이 강화될수록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지는 법이지요. 그러니 삼국유사에 '도미 부부 설화'와 같은 슬픈 전설이 개로왕 시기를 배경으로 남아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 사회의 진보가 꼭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삼국의 지배층들은 율령과 무사 계급에서 나오는 군사력으로 사회를 고도화했지만, 곧 수탈의 올가미가 더욱 교묘해졌다는 의미도 되니까요.
삼국사기에는 이런 토목공사가 고구려의 간첩이자 승려, 도림의 세 치 혀에서 비롯됐다고 전합니다. 왕권 강화 행보를 보이던 왕이 급기야 대형 토목공사까지 벌이자 중앙 귀족들의 반감도 극에 달했습니다. 정쟁에서 패한 귀족들이 고구려로 도망하는 사례도 이어지죠.
아무튼 왕권 강화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개로왕은 다음 행보에 나서기로 합니다. 전지왕 이래 대고구려 유화정책을 이끈 해 씨 세력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다시 고구려에 대한 강경책에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본격적인 전쟁 대비에도 나섭니다. 개로왕은 백성들을 징발해 흙을 ‘쪄’ 성을 증축했다고 합니다. 2011년 한 연구에서는 백제인들이 몽촌토성 증축 시 흙에 시멘트 역할을 하는 석회를 섞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흙을 쪘다(증토)’는 것은 바로 석회에 물을 부어 소석회(消石灰)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과 수증기를 묘사한 것이라는 재미있는 분석입니다.
어쩌면 부드러운 성의 겉모습에 숨겨진 몽촌토성의 그 강고함은 개로왕이 남긴 마지막 유산일 수도 있겠습니다.
왕은 장기와 바둑을 즐겼습니다. 고구려 출신인 도림을 가까이한 것도 그 때문이었죠. 개로왕에게 승부사적 기질이 있었는지는 바둑을 같이 둔 도림만이 알겠지만, 아무튼 왕은 백제와 동아시아의 운명을 걸고 제법 대범한 ‘포석’을 둡니다. 그간의 외교역량을 총동원해 고구려를 고립시키고, 중국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겠다는 담대한 작전입니다.
본래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주로 통교했고, 신라와는 군사 동맹, 왜와 가야에게서는 군사적 협력을 받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개로왕 때부터 다시 북조 즉 북위에 대한 조공을 시작하지요. 왜와 가야를 대고구려 전쟁에 동원한 것처럼, 그 판에 북위와의 동맹이라는 수를 두기로 한 것입니다.
472년 개로왕은 손수 북위에 국서를 보내고, 고구려에 대한 동시 공격을 요청했습니다. 북위도 고구려를 견제할 필요성이 높았기에 일견 타당한 전략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흔히 도림의 간첩질에 개로왕이 ‘낚인 것’처럼 기록돼 있지만, 첩보전에서도 백제는 밀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장수왕의 왕권 강화로 고구려에서도 내부 혼란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이를 북위에 알려 공격을 유도한 점이 대표적입니다.
아울러 개로왕은 국서 말미에 고구려군이 북위 사신의 배를 바다에서 공격했다고도 주장합니다. 그 증거로 바닷가에 떠내려온 북위 사신의 말안장도 함께 딸려 보냅니다. 북위 지배층의 감정을 흔들기 위한 심리전입니다.
그런데 북위의 반응이 뜻밖에도 냉정합니다. 고구려에 대한 정책 방향이 이미 북위 조정 내부에서 결정이 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다소 불안정해도 고구려는 장수왕 때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시점이었죠. 북위라도 물이 오른 고구려와 전쟁을 굳이 감수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국서 사건’은 개로왕의 몰락을 앞당긴 직접적인 실책이 됩니다. 왕의 최측근인 도림부터 고구려의 간첩이었으니, 이미 고구려 첩보망에 의해 백제가 북위와의 양동작전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구려 왕궁에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백제의 이런 구상은 너무 대담한 것이어서 오히려 고구려의 안보 위기감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백제에 대한 적개심만 다시 커진 것이죠.
475년의 어느 날 승려 도림이 백제 왕성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해 가을, 장수왕은 82세의 노구로 3만 명의 고구려군 정예를 직접 이끌고 한강으로 향합니다. 고구려군의 전략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바로 백제 왕실의 멸망이었습니다.
고구려군은 군대를 넷으로 나눠 전광석화같이 위례성으로 질주했습니다. 군대의 선봉은 백제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으로, 개로왕과 반목하다 도망친 이들입니다.
고구려군은 먼저 북성, 즉 풍납토성을 공격했습니다. 백제의 왕도는 단단했습니다. 3만의 군세로 눌러도 토성은 함락되지 않았죠. 고구려군은 화공으로 작전을 바꿉니다. 곧 성문 등이 불타올랐고, 기록에는 이때부터 성 내에서 매우 두려워하는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풍납토성 발굴 당시 토성 내 지하 곳곳에서는 불에 탄 나무들이 다수 발견됐습니다. 고구려와의 전쟁 때 흔적입니다. 이런 탄화목 일부는 지금도 한성백제박물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공격 7일 만에 풍납토성이 고구려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남성 몽촌토성에서 방어전을 지휘하던 개로왕은 기병 수십을 이끌고 성을 몰래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선봉에 선 자들이 백제 출신들이었지요. 도주로를 꿰뚫어 보고 있던 이들에 의해 결국 왕은 사로잡힙니다.
고구려 장수가 된 걸루와 만년은 사로잡힌 자신의 옛 군주에게 절을 올립니다. 이어 왕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죄상을 나열한 후 포박된 왕을 지금의 아차산으로 끌고 갑니다. 개로왕은 거기서 자신의 옛 신하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함락된 위례성에서는 태자와 왕후 등 왕족 상당수가 살해됐고, 8000명의 왕성인이 고구려로 끌려갔습니다.
천하를 둔 고구려와의 대국에서 개로왕의 ‘승부수’는 그렇게 잿더미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강국 백제의 꿈도 일장춘몽에 그친 채 그해 한강의 겨울 물살과 함께 아스라이 사라져 갔지요.
다시 봄이 온 몽촌토성은 상춘객들로 붐빕니다. 1500년 전의 상흔은 이제 없고, 특이한 풍정의 ‘나 홀로 나무’는 연인들이 추억을 남기는 장소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원래 나무가 나 홀로였던 것은 아닙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토성 내에는 자연 부락이 있었고, 나무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원 조성과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민가들은 헐렸고 저 나무만 외로이 자리에 남게 된 것이죠.
몽촌토성만이 오늘도 저 멀리 백제인들, 그리고 이곳에 한때 터 잡았던 사람들이 바랬던 아득한 꿈들을 품은 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운이 조금만 더 따라줬다면 ‘강대국 백제’라는 개로왕의 꿈은 실현됐을까요.
능히 그럴 만한 능력도 있었던 지도자이지요. 그러나 만약 안정된 내정을 원했다면 전쟁은 아마 그만둬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원했다면 일단은 귀족들과 힘을 합치는 것이 우선이었겠죠.
그러나 두 가지를 다 가지려 했던 야망의 군주는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문득 왕이 보다 수성(守城) 형 군주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덧없는 상상을 해봅니다.
누구나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지기를 바라는 세상입니다. ‘갱신’과 ‘확장’이 시대의 언어이고 ‘경쟁’이 수단인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일수록 머문다는 것,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자리를 지킨다는 건 어쩌면 세상에 대한 가장 고요하지만 강력한 저항일는지 모릅니다. 속도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고, 자기만의 리듬대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은 아무나 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