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웅진(1)] 수촌리, '플랜 B'의 위대함

by whiteshore

웅진 땅으로 들어서면서

충남 공주시 그러니까 웅진은 백제사에서 임시수도의 느낌이 강합니다. 600년 역사에서 수도였던 시간은 60여 년 남짓에 그칩니다. 그러나 웅진백제의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죠. 백제사에서 웅진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군 막사에서 즉위식을 올려야 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던 백제 왕실은 불과 50년 후 한강 일대를 공략하고, 황해도 일대에 대한 군사적 공취에 나설 정도로 국력을 회복합니다.


한성기에 버금가는 전성기의 토대를 닦고, 동아시아 문명의 교두보로 자리매김한 ‘갱위강국(更爲强國)’의 시대가 웅진백제인 것입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힘의 재편이 이뤄졌던 격변기였습니다. 대륙에서는 5호 16국의 혼란이 심화됐고, 고구려는 동북아의 신흥 패자로 팽창정책에 열을 올렸습니다.


왕조의 절멸 위기를 딛고, 중흥을 일궈낸 백제의 역전극은 다극화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한 우리 개인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젖줄 한강을 떠나, 인고 끝 희망을 일궈낸 역전의 땅 ‘공주’로 떠나 보겠습니다.




백제의 중흥은 위기 상황에서도 단기간에 천도가 이뤄졌기 때문에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백제의 성공적인 웅진 천도가 가능케 했던 배경을 말해주는 곳이 있습니다. 웅진 시대으로의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우선 공주시의 작은 마을로 향해 봅니다.


금강은 북쪽에서 흐르는 지류들이 모여 서남쪽으로 흘러갑니다. 금강의 주요 지류 중 하나가 공주 ‘정안천(正安川)’입니다. 금강에서 정안천을 도로 거슬러가면 공주 수촌리 마을이 나오지요.


3472594459338980176.jfif 고분군에서 내려다본 수촌리의 전경.


높고 짙푸른 하늘 밑 드넓은 논들 사이로, 야산과 비닐하우스가 드문드문 이어지는 조용한 농촌이 수촌리입니다. 바로 이곳에 백제사의 다음 장을 열어젖힌 주역들이 1500년의 세월 동안 잠들어 있습니다.


3472594459350096208.jfif 공주 수촌리 고분군으로 향하는 은행나무 길.


여름 땡볕에 달궈진 아스팔트의 열기를 헤집고, 수촌초등학교 뒤편으로 향하니 ‘수촌리 고분군’이라는 투박한 안내판이 나옵니다. 고분군을 향해 조성된 은행나무 숲길이 빛살을 잠시 막아줍니다. 왼편으로 고개를 드니 은행잎들 사이로 무덤 떼가 곧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흰 구름이 흐르는 아래, 양지바르고 완만한 경사에는 크고 작은 옛 백제의 무덤이 제법 촘촘한 간격으로 옹기종기 붙어있습니다. 바로 수촌리 고분군 ‘2구역’입니다.


3472594459348782160.jfif 수촌리 고분군 2구역. 한성백제 당시 이 지역의 유력자들이 묻힌 무덤이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은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뉩니다. 은행나무 숲길 끝에 붙은 2구역, 그리고 앞으로 둘러볼 1구역입니다. 2구역은 주로 백제 한성 시기 무렵의 고분들이 주를 이룹니다.


조용한 수촌리가 유명세를 얻은 것은 이곳 2구역의 무덤에서 출토된 껴묻거리가 학계를 한 차례 뒤집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3년, 농공단지 조성을 앞두고 사전 발굴조사가 한 차례 진행됐습니다. 단순 요식 행위인 만큼 조사에 참여한 학자들도 별 기대 없이 삽을 뜬 것이었지만, 곧 놀랄 만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지요.


3472594408631403344.jfif 수촌리 고분군 2구역에서 출토된 실물 금동신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촬영.


3472594408883314256.jfif 2구역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의 복원품.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촬영.


최고급의 금동관모, 금동신발은 물론 대도(大刀), 중국제 흑유 자기와 청자, 옥과 유리로 만들어진 구슬과 금제 귀고리 등 무덤 주인들의 위세를 짐작하게 할 화려한 유물들이 학자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실제 발굴에 직접 참여했던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수촌리 고분을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발굴 성과”라고 소개할 정도로 그 파급력은 상당했습니다.


특히 수촌리 유물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게 바로 백제계 금동관모입니다.


수촌리에서는 백제 금동관모가 2구역 내에서만 2점이나 출토됩니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백제계 금동관모는 총 8개에 불과하죠.


금동관모가 한 곳에서 2개 이상 출토된 사례는 수촌리가 유일합니다.


3472594408294393680.jfif 한반도와 일본에서 발견된 백제식 금동관 복원품. 한성백제가 지방 유력자에 하사한 물품이다. 백제역사문화관에서 촬영.


백제계 금동관모는 시기적으로는 한성백제 시기인 4~5세기경, 지역적으로는 주로 충남(4점)에 집중되고 있고 전북과 전남, 경남, 경기에서 각 한 점씩 발견됐습니다. 해외에서는 특이하게도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현의 무덤에서 한 점이 출토됐습니다. 기법으로 보면 시기는 가장 늦습니다.


금동관모 출토 지역에서는 공통적으로 금동신발이나 환두대도, 중국제 도자기 등이 함께 확인됩니다. 또 한성 시기의 유물임에도 백제의 핵심지역인 한성 일대에서는 출토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학자들은 백제 중앙정부가 영향력을 미쳤던 지역의 귀족에 하사한 위세품으로 봅니다. 지방 출신으로 백제 중앙 조정에서 관·작을 부여받았던 귀족들이 이런 금동관모의 주인들로 추정되지요.


3472594452903563856.jfif 수촌리 2구역에서 출토된 청자 뚜껑 항아리와 흑유 닭모양 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촬영.


중국에서만 제작 가능했던 닭머리 자기, 군권(軍權)을 상징한 환두대도, 그리고 백제 왕실이 하사한 금동관모를 통해 수촌리의 지배세력은 웅진 일대에서 그 권위를 한껏 내세웠을 것입니다.


막강한 백제 왕실과 ‘연줄’이 닿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쟁세력이 이들에게 감히 도전하기는 힘들었겠지요.


아울러 다른 곳과 달리 이런 금동관모가 2점이나 발견됐다는 것은 수촌리 사람들이 그만큼 한성의 백제 왕실과 강력한 유대관계를 이어왔음을 방증합니다.


한성이 고구려에 함락된 후 백제 왕실이 굳이 공주를 다음 도읍지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죠.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왕실을 다시 재건하는 일에 수촌리 세력이 상당한 도움을 미쳤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수촌리가 백제사에서 갖는 위상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앙박물관의 선사·고대관 내 ‘백제실’ 입구에는 600년 백제 역사를 대표할 핵심 유물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백제사를 대표할 유물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무령왕릉이 빠질 수 없죠. 당대 금속 세공기술의 정점인 무령왕릉 왕비의 금제관식 바로 아래에는, 수촌리에서 발굴된 금동관모(1호분 유물)와 자기들, 환두대도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학계가 수촌리 유적의 비중을 어느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례입니다.


3472594452903499088.jfif 수촌리 고분군 2구역 내 1호분에서 발굴된 금동관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촬영.
3472594408884607312.jfif 수촌리 고분군 2구역 1호분 금동관모의 복원품.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촬영.


유물은 비록 그 중요성 때문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지만, 껴묻거리나 무덤의 조성 방식을 연구한 학자들은 수촌리 고분 2구역을 유력 가문이 대를 이어 조성한 일종의 ‘가족 공동’ 묘지로 해석합니다. 살아있을 때는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다, 죽은 뒤 다시 자신들의 기반인 수촌리로 돌아와 묻힌 것이죠.


가장 먼저 백제 왕실과 관계를 맺은 유력자는 1호분의 주인으로 추정됩니다. 아직 백제 영향을 받지 않은 현지 방식의 무덤(토광목곽묘)에 묻혔기 때문입니다. 상기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관모의 주인이기도 하죠.


1호분의 손자 세대 무덤인 4호분에서는 수촌리 고분 중 가장 화려하고 많은 껴묻거리가 나왔습니다. 이 시기 수촌리 재지세력이 가장 강성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촌리 고분군 2구역 내 4호분에서 발굴된 금동관모.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3472594408294095696.jfif 수촌리 고분군 2구역 4호분 금동관모의 복원품. 백제역사문화관에서 촬영.

4호분에서 나온 금동관모는 고향인 국립공주박물관 내 충청남도역사문화실에서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1호분의 것과 비교하면 날개 모양의 장식도 비교적 잘 남아있어 1600여 년 전의 것임에도 본래의 화려함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지요.


박물관 내에 어떤 설명도 붙어있지 않지만, 사연을 알면 애틋함마저 느껴지는 유물도 전시돼 있답니다. 4호분 금동관모 옆에는 공주 인근 각지에서 출토된 백제 당시의 화려한 공예품들도 전시돼 있는데요. 이 중 자세히 보면 가로로 길게 놓인 유리옥 두 점이 눈에 띕니다.


3472594459372494672.jfif 사진 우측 중앙에 가로로 눕혀진 것이 4호분과 5호분에서 나온 대롱옥 2점이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2003년 발굴 시 4호분에서는 깨진 유리옥이 하나 나왔습니다. 발굴 당시에는 유리옥의 용도나 옥의 한 면이 부러져 있는 이유를 도통 알 길이 없었죠. 수수께끼는 ‘멀지 않은 곳’에서 풀립니다. 유물보고서를 작성하던 과정에서 연구자들이 옆 5호분에서 발굴된 파손 유리옥과 4호분의 유리옥이 꼭 닮았음을 1년 만에 알게 된 것입니다.


4호분과 5호분 유리옥의 부러진 단면을 서로 맞댔더니 과연 하나로 딱 들어맞았다고 합니다. 5호분의 피장자는 여성으로 추정되므로 4호분과 5호분은 부부 사이였던 것이죠. 말하자면 이 유리옥은 이들만의 징표였던 셈입니다. 수촌리에 잠든 이들 부부는 유리옥을 통해서 죽음도 세월도 갈라놓지 못할 영원의 약속을 맺으려 했던 것일까요.


3472594459339868496.jfif 1구역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작은 못이 하나 나온다.


1600년 전의 사연을 뒤로한 채 다시 북쪽 구릉에 위치한 1구역으로 향합니다. 아직 8월 중순이지만 수촌리에서는 방문객들을 위한 이른 벌초가 한참입니다. 갓 베어낸 싱그러운 풀냄새를 즐기며 다시 탐방로를 걷습니다. 꼿꼿이 솟은 소나무와 연꽃이 무성한 작은 못을 지나, 어느덧 십 수기의 무덤이 있는 구릉에서 발을 멈춥니다.


1구역에는 백제뿐만 아니라 아득한 철기시대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덤들이 다수 있습니다. 이곳 구릉지대에 오르면 왜 이천 년 전부터 많은 이들이 이곳을 영원한 안식의 장소로 택했는지 선뜻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무덤이 오밀조밀 묻혀 있는 구릉 옆 전망대에서는 수촌리의 푸른 산과 너른 들의 탁 트인 풍광이 한눈에 담기거든요. 천수백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하늘과 땅의 경관에, 경탄이 나직이 새어 나옵니다.


3472594459342284368.jfif 수촌리 고분군 1구역 전경.


수촌리의 안녕도 영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북방에서 시작된 풍파는 한반도 중부에 몰아닥쳤습니다. 고구려의 철기가 아리수를 넘었고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 간의 피비린내 나는 쟁패가 수백 년을 이어갔습니다.


백제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발붙여 살아온 수촌리 사람들도 역사의 격랑에 휩쓸립니다. 이 시기부터 역사서에는 ‘연 씨’나 ‘백 씨’ 가문 등 신흥 귀족 세력이 백제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백 씨와 연 씨는 백제의 핵심 가문인 ‘대성 8족’의 하나로, 웅진 토착 세력으로 추정되지요.


수촌리 사람들이 이들 귀족 가문과 연관이 있거나 웅진 천도 후 중앙 귀족으로 편입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결론입니다.


웅진 천도 후 수촌리 사람들의 무덤은 수백 년 간 더는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웅진의 왕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췄고, 촌민들을 호령했던 수촌리의 귀족들도 백제 멸망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1500년간 이 땅을 지켜온 옛 무덤만이 언제고 그래온 마냥 수촌리의 들녘을 말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3472594459343595088.jfif 수촌리고분군에서 본 충남의 여름 하늘.




냉전기 때 탄생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담론이 현재까지도 종종 통용됩니다. 사실 5세기의 한반도보다 불확실성이 팽배했던 시대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불확실한 시대에는 유연한 사고와 대안이 생존과 직결되는 법이지요.


기록을 보면 백제는 멸망의 위기에서도 이미 ‘다음’ 대응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나 ‘플랜 B’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랬기에 미리 기반을 닦아둔 웅진으로 재빠르게 천도해, 국가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고구려 전쟁으로 북방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동안에도, 백제의 시선은 남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마한의 여러 소국에 힘을 보태며, 조용히 행정과 세력의 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눈부신 정복의 이면에서, 묵묵히 다음 단계를 준비한 것이죠.


아울러 수촌리의 금동관이 말해주듯, 백제는 군사력만으로 세를 넓히지 않고 지방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중앙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만약 무력 일변도로만 사회 통합이 이뤄졌다면, 위기 상황에서 백제라는 거목은 터져 나온 반발로 인해 곧바로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부드럽고 유연한 대비가, 훗날 백제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 결정적인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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