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습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게 됩니다. 다시 덩굴이 뻗어 자라듯 되살아날까 두렵습니다. 뒤쫓아 가서 제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했다. - <일본서기>
수촌리 마을에서 공주 시내로 길을 잡았습니다. 웅진 시대 백제의 옛 도읍지로 향하려면 우선 금강을 넘어야 합니다. 금강 위 '백제큰다리'에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면 강변 위로 햇빛에 번쩍이는 누각과 험준한 성벽, 그리고 사이사이로 황색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바로 백제 때 웅진성으로 불렸던 공산성입니다.
토성이었던 1500년 전과는 당연히 성곽의 모습에서 많은 차이가 있겠으나, 성벽에 내걸린 사신도 깃발과 가파른 성벽의 위용이 사뭇 그럴싸해, 지금이라도 백제의 초병들이 성벽에서 방문객들을 향해 호령할 것 같은 상상도 불러일으킵니다.
회전교차로 앞에는 무령왕의 거대한 동상이 무령왕릉 방향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습니다. 그 뒤로 공산성의 서문이자 사실상의 정문 역할을 맡고 있는 ‘금서루’가 공주시가지를 늠름히 내려다봅니다. 금서루에서 성벽의 동남쪽을 따라 이날의 답사를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백제 시대 왕궁지를 빠르게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서문에 오르는 비탈길에는 세계유산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조선시대 비석들이 도열해 방문객을 맞습니다. 공주 일대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모아놓은 것으로 관리들의 업적을 칭송하는 송덕비들입니다. 공산성에는 조선조 때에도 충청감영이 있었고, 공주목 역시 충청의 행정 요충지였습니다.
오늘날에는 목민관들은 간 데 없고, 관람객을 보고 놀란 새끼 고라니들이 송덕비 위 가파른 성벽을 이리저리로 뛰어놉니다.
공산성은 현장 답사의 중요성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공산성은 흔히 기록에서 ‘천혜의 요새’로 비견됩니다. 자연 구릉과 능선을 따라 축조된 공산성의 성벽과 성곽길을 위아래로 두루 오르내리면, 왜 1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런 명성이 따라붙었는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성벽의 높이 자체는 2~3m 남짓이지만 성벽이 해발 100m 높이의 험준한 구릉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구릉의 능선을 따라 굽이 굽이 용틀임을 한 형세입니다. 성벽 수십여 미터 아래 펼쳐진 공주시가지가 아찔합니다. 공주 왕릉원이 조성된 송산(宋山) 일대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백제가 수도를 공주로 옮긴 이유도 지금의 세종시까지 성난 파도처럼 밀고 내려왔던 고구려 군을 막아내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 컸습니다.
475년의 겨울, 개로왕의 엄명을 받들어 목협만치 등 백제 귀족 여럿과 한성의 문을 다급히 나선 왕의 동생 문주는 신라의 구원병 1만 명과 함께 수도로 올라오던 중 참담한 비보를 접합니다. 고구려군의 침공에 한성이 불타오르고 왕실 직계가 멸문의 화를 입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죠.
돌아온 왕성은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형 개로왕은 사로잡혀 목이 잘렸고, 형수와 태자였던 조카도 무참히 살해됐습니다. 고구려군은 일시적으로 한성에서 물러났지만, 언제 재차 침공을 해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황망히 왕위에 오른 문주는 결국 즉위 한 달 만에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천도를 결정하게 됩니다. 공산성을 비롯한 공주 일대가 수도 이전의 유력 후보지로 떠오릅니다. 공산성 자체가 공성전에 뛰어난 지형임은 물론이고, 공주 전체의 입지도 차령산맥과 계룡산에 막혀 방어에 있어서 매우 유리한 환경이었기 때문이죠.
금강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주는 후일을 기약하기에는 상당한 장점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진남루와 임류각을 지나 공산성 연지로 향하는, 성곽길에서도 제법 가파른 구간을 걸어봅니다. 성의 서쪽과 남쪽의 구릉과 능선이 성벽의 역할을 한다면, 성의 북동쪽을 따라 흐르는 금강은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합니다.
사라진 왕실을 수호하겠다는 듯 금강은 오늘도 옛 왕성을 휘둘러 감돌며 서남해로 흐릅니다. 금강을 마주 본 공산성 전망대에서 강 상류 쪽을 바라보면 공주대교와 신공주대교는 물론, 멀리 공주 명덕산 일대까지 바라볼 수 있어 그야말로 주변 일대를 감시하는 감제고지로는 그만입니다.
금강은 방어적 이점 외에도 서해로 이동 가능한 교통망과 수운 인프라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에는 강과 하천이 곧 오늘날의 포장도로와 같았죠. 금강을 통해 백제는 공주 일대는 물론, 남쪽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막대한 부를 실어 날랐습니다.
이런 공주 일대 수운 교통을 장악한 이들이 바로 앞서 살펴본 수촌리 세력이었을 것입니다. 수촌리를 비롯, 충남 일대 재지세력이 백제 중앙의 실세로 올라선 것도 이 시기 일이었지요.
그러면 공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이 머물렀던 궁실의 흔적은 어디 남아 있을까요.
진남루에 닿기 전 잠시 길을 틀어 쌍수정 일대를 불러봅니다. 쌍수정은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와 인연이 있습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잠시 공산성으로 피신했던 때, 성 안 두 그루 나무(雙樹, 쌍수)에 기대 시름을 달랬는데 이후 이 자리에 세운 정자에 쌍수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합니다.
쌍수정 사적비 바로 앞에는 제법 널찍한 평지가 하나 있습니다. 피난 온 인조 자신은 결코 몰랐겠지만, 쌍수정 아래 너른 마당이 바로 백제 왕궁터의 일부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선 기와로 빼곡히 덮여있었을 백제의 대형 목곽 저장 시설과 우물 등이 발견됐습니다. 더불어 건물의 앞과 뒤에 도랑을 파내고 기둥을 세워 기와를 올린 ‘벽주건물’의 흔적도 드러났는데, 이를 통해 이곳에 들어선 건물들이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라는데 지난 1980년대부터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진 듯합니다.
백제가 공산을 서울로 택한 이유를 알 수 있다면, 60년 만에 다시 터전을 부여로 옮긴 이유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은 왕궁지를 둘러보면 한 나라의 수도로는 확실히 비좁다는 느낌을 아무래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025년 8월 현재 각 건물터는 방수포 등으로 덮여있습니다. 국립공주대학교가 같은 해 6월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한 흔적입니다. 추정 왕궁지의 부지가 워낙 협소했기 때문에, 실제 왕궁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여러 차례 이뤄진 것입니다.
다만 2019년 겨울, 공주대 조사에서 이런 논란을 매듭지을 결정적 ‘한방’이 나왔습니다. 쌍수정 인근에서 길이 50m, 너비 36m의 공간을 3.5m 깊이로 성토다짐(흙을 여러 번 쌓고 다져 지반을 다지는 방식)해 만든 대형 출입문의 흔적이 나온 것입니다. 왕이 머문 궁에서만 설치됐다는 출입시설인 ‘문궐’(門闕)로 추정됩니다.
아울러 현재 쌍수정이 위치한 곳 역시 백제 당시 의도적으로 높이를 높여 만든 단(壇)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공산성이 왕이 머물렀던 왕성이었음이 매우 유력해진 순간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문주왕 3년인 477년 봄 궁실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해당 유적은 웅진 천도 직후 만들어진 궐문으로 추정돼, 조사 결과대로라면 문주왕과 연이 있는 유적일 가능성도 있고요.
문주왕의 문궐을 뒤로하고, 금강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면 급경사로 이뤄진 성곽길을 따라 만하루와 연지, 그리고 공북루가 나옵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연못과 누각들로 현대에 다시 개축된 곳이지만, 금강의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공산성 내에서는 최적의 장소들입니다. 강바람에 북방을 수호한다는 현무가 황색 깃발 안에서 움실대고, 공주의 하늘을 머금은 금강도 푸르게 반짝입니다.
백제 왕성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마지막 장소에 다다릅니다. 공북루 뒤편으로 돌아서면 흡사 잔디밭과 같은 넓은 평지가 나옵니다. 산성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으로, 성안마을 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평탄한 구간에서 웅진 시대의 다양한 대형 건물터의 흔적이 나왔습니다.
산성공원은 공산성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조사가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상상하기 어렵지만 불과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 엄연한 마을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가가 철거된 이후인 2005년도에서야 성안마을 부지에 대한 본격적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3만㎡ 부지에는 도로와 배수시설, 목곽고, 연못 등 저수시설, 관청으로 추정되는 왕국 부속건물지, 종교 의례가 행해졌을 육각형 모양의 건물지, 왕실의 물품을 제작했던 공방 등 매우 다채로운 건물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원래는 자연 계곡이었던 지역을 토목공사를 통해 메꿔 다지고, 여기에 도로와 배수로의 기반 시설을 조성한 후 축대를 세우고 대형 건물을 올렸습니다. 발견된 건물의 수만 약 70개 동 가량이라고 하니 고급 건물들이 제법 촘촘히 모여있었던 것 같습니다.
쌍수정 일대가 백제 왕궁의 관문이었다면, 성안마을 터는 백제 귀족들과 관료들이 국가 부흥의 초석을 다진 중심지였습니다. 남북과 동서로 회랑처럼 이어지는 대형 벽주건물터에는 건물의 흔적과 함께 깨진 벼루 조각이 상당히 많이 출토됐지요.
공산성은 왕성일 뿐만 아니라 행정 기능도 수행한 행정도시였던 셈입니다.
공원 내 설치된 증강현실 디스플레이를 통해 웅진성 당시 성안마을 일대를 불러볼 수도 있습니다. 투명 디스플레이를 통해 현재 위치에 어떤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관계자에게 확인해 보니 2020년 입찰 공모를 통해 설치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전까지 공산성에서 백제의 흔적을 되짚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수였지만, 그런 수고를 다소나마 덜게 된 셈입니다.
문주왕은 한성과 일대 민호를 이곳 공산성과 인근 대두산성 등에 이주시키는 작업에 착수하고, 궁성의 기능 확충에도 속도를 냈습니다. 비록 규모는 비좁았지만, 중수와 사민을 거쳐 왕성의 기능을 완성해 간 웅진에서 백제 중흥의 꿈도 영글어 갔지요.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왕실의 권위는 떨어졌고, 이주한 한성 출신 및 웅진 귀족의 힘은 나날이 비대해졌습니다. 문주왕은 재위 3년 차에 귀족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친위세력 형성에 나선 지 5개월 만입니다. 문주왕 사후에도 왕들의 비명횡사와 모반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패전의 후유증과 함께 발아한 내분의 씨앗을 뿌리 뽑는 데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죠.
일본서기에는 위례성을 함락한 고구려군이 패전한 백제 장수들이 창고에 몸을 의지한 채 비통해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절망보다 오히려 울분이 어려 있었습니다. 병기와 식량이 부족했을 뿐, 그들의 의지는 아직 꺾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성을 버리고 공주로 남하한 백제군은 불리한 처지 속에서도 과연 그 감투 정신을 발휘했습니다. 고구려군의 남하 시도는 결국 공주 인근에서 좌절되고 말죠.
고구려 장수들이 잔당을 끝내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장수왕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왕은 백제의 저항 의지가 덩굴처럼 질기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던 것이죠.
문주왕이 수백 년간의 도읍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떠나야만 성장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한성에 머물러 있었다면 고구려군을 격퇴하지도 못하고 왕실도 더 큰 위기에 빠졌을 테니까요.
현실을 인정하는 용기, 그리고 새로이 선택한 조건에서의 분투를 통해 백제는 최악의 국난을 넘기게 됩니다.
벽에 부딪혔다면, 과감히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택할 줄 아는 결단,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좀처럼 체득하기 힘든 용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