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웅진(3)] 피어린 백제판 '왕좌의 게임(上)

by whiteshore


공산성에서 나와 웅진시대의 왕들을 만나러 갑니다. 산성 앞 회전 교차로에서 ‘백제 무령왕릉 연문(埏門)’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지난 1993년 조성된 무령왕릉 연문은 무령왕릉으로 향하는 길목을 왕릉의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연문의 뜻은 ‘무덤 속으로 향하는 문’이라고 합니다.


3472594459411152976.jfif 무령왕릉 연문의 모습. 무령왕릉을 모티브로 한 기념물이다.


문의 구조는 무령왕릉의 세련된 디자인과 유물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아치형의 문은 무령왕릉의 입구를 형상화했죠. 연문 외벽은 무령왕릉의 벽돌을 본뜬 전돌로 덮여있고요. 문 앞과 뒤로는 무령왕 내외의 금관장식이, 벽 좌우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거울을 본뜬 2m 크기의 대형 거울이 붙어있습니다.


오래전 백제인들은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안식처를 공간적으로 뚜렷하게 분리했습니다. 연문의 뜻처럼 공산성에서 백제 왕릉이 집중 조성된 송산리의 왕릉원으로 향하려면 이 문을 먼저 통과해야 합니다.


공주는 명실공히 '왕릉'의 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문을 지나, 백제식 수막새로 장식된 기와로 덮인 다리 ‘왕릉교’와 이어진 ‘왕릉로’를 달립니다. 도로를 따라 약 1km를 이동하면 나오는 문예회관 교차로에는 '웅진백제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3472594408612115536.jfif 웅진백제역사관의 전경.


무령왕릉 주변에는 이미 국립공주박물관과 전시관이 따로 있지만, 웅진 백제에 대한 역사를 별도로 설명해 줄 전시관이 없어 지난 2013년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전시관 관람 후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향할 수 있도록 별도의 동선도 조성돼 있습니다. 그러니 무작정 왕릉원으로 향하기보다는 웅진백제역사관을 한 번 둘러 답사를 위한 예습을 하는 편이 좋습니다.


역사관 자체는 더위에 지친 관광객들을 위한 쉼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개괄적인 내용만 있어 간단히 둘러보고, 왕릉원으로 향하는 분들이 다수입니다.


3472594408611968592.jfif 웅진백제역사관 내에 설치된 무령대왕의 동상,


역사관으로 들어서면 역시나 ‘무령대왕’의 전신 입상이 방문객을 맞습니다. 공산성 앞 동상과 동일한 형태인데 크기만 훨씬 작을 뿐이죠. 이어 웅진에서 왕위에 오른 다섯 임금의 업적을 소개하는 전시공간이 하나 나옵니다.


설명과 함께 전시된 임금들의 모습은 모두 상상화입니다. 그러나 복식 등의 고증 수준은 최근에 건립된 역사관인 만큼 매우 충실하고, 왕들의 개성과 특징도 의복에 반영해 그림이 주는 이미지는 제법 생생합니다.


무령왕 재위 전까지 웅진기의 백제 왕실은 피로 얼룩졌습니다. 그림 내 설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웅진에서 생을 마친 4명의 왕 중 천수를 누린 임금은 무령왕이 유일하지요.


3472594408610643280.jfif 웅진 도읍기의 왕들을 설명하는 전시실,


마르고 나이 든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된 임금이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긴 문주왕입니다. 문주왕이 살해되고, 다음 왕위를 이은 임금은 삼근왕으로, 15세에 세상을 뜬 비운의 소년 왕입니다. 기록에 걸맞게 앳된 소년의 모습입니다.


12세의 삼근왕을 왕위에 올린 사람은 병관좌평 ‘해구’입니다. 바로 문주왕 시해를 주도한 핵심 인물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삼근왕이 문주왕의 맏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삼근왕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인물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 오르게 된 셈입니다.


왕을 갈아치운 해구는 백제 대성 8족의 하나인 해 씨 가문 출신입니다. 목 씨, 진 씨와 더불어 한성백제 당시 핵심 귀족 가문입니다. 해구의 관직인 병관좌평은 국방과 지방의 병권을 다루는 여섯 좌평의 하나로, 좌평은 백제의 최고위 관등이었습니다.


3472594408610360144.jfif 문주왕과 삼근왕, 동성왕의 상상화가 그려져 있다.


한성이 함락되고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물러나면서 귀족 세력에 대한 왕실의 통제권은 약화됐습니다. 한성에 기반을 뒀던 해 씨 등의 가문은 기반이 축소된 채 웅진으로 향할 수밖에 없어 왕실에 대한 불만이 컸죠. 아울러 천도 이후 지역 경제권을 장악한 웅진 일대 신흥 귀족의 발언권은 더욱 확대됐습니다.


자연스레 왕실과 귀족세력 간 힘의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성기에는 왕이 왕의 형제나 장인을 중앙 관료의 장(長)인 상좌평에 임명해, 귀족 세력에 대한 적절한 견제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웅진 천도 후에는 이런 방식이 먹혀들지 않게 된 것이죠.




문주왕 시해는 결국 시스템보다 칼이 앞서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신호인 셈이었습니다.


시스템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결국 욕망의 충돌뿐이지요.


병관좌평직을 통해 병권을 장악한 한성 출신 구(舊) 귀족 세력은 연 씨 등 일부 웅진 신흥 귀족들과 손잡고 왕실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를 제거하고 이윽고 문주왕도 살해한 해구의 전횡은, 그러나 곧 다른 구귀족들의 불만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다른 구귀족 중 하나인 진 씨 가문이 왕명을 내세워 해 씨 축출에 나서기로 합니다. 해구는 연 씨 일부와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국 목이 잘리고 말죠.


그렇다면 이제 삼근왕은 의젓하게 통치를 해나갔을까요? 글쎄요. 역적 해구는 몰락했지만 이제는 진 씨 가문의 천하가 됩니다.


피로 물든 웅진 백제의 역사를 일단 뒤로 하고 왕들이 잠든 곳, 송산리의 왕릉원으로 다시 향하면서 삼근왕의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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