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에서 공주 왕릉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세계문화유산 표지석과 함께 왕릉원 입구가 나옵니다. 공주의 마스코트인 진묘수 조각과 소나무들이 왕릉원을 찾는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듯합니다.
공주 왕릉원은 웅진시대 백제 왕족들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동시에 종교적 성소(聖所)입니다. 아울러 백제가 당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문명 교류의 가도(街道)였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하는 장소이기도 하지요.
왕릉원에는 약 20 여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정비가 완료된 것은 7기에 불과합니다. 왕릉원은 120m 높이, 야트막한 송산(宋山)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해 있습니다. 정비된 무덤은 얕은 골을 중심으로 서쪽에 3기, 동북쪽에 4기가 있습니다.
서쪽이 A지구로 왕릉원의 간판 무덤인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습니다. ‘수호신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탐방로를 따라 바로 위 구릉으로 향하면 1∼4호분이 있는 D지구가 나오지요. 여기에서 왕릉원 뒤편 능선을 따라가면 백제 왕실의 장례·제의 시설인 정지산 유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왕릉원 입구 우측에는 고분 모양을 흉내 낸 큰 건물이 눈에 띕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이라는 글자가 햇살에 번쩍입니다. 공주 왕릉원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관입니다. 폐쇄된 실제 고분을 대신해, 무령왕릉 등 주요 무덤의 내부 구조를 실제 크기로 정교하게 재현해 둔 곳입니다.
공주 왕릉원의 고분은 크게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과 전축분(벽돌무덤)으로 나뉩니다. 전시관에는 이 중 횡혈식 석실분의 대표 무덤인 5호분과 전축분의 대표 격인 무령왕릉, 그리고 6호분 내부가 그대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굴식돌방무덤은 한성 백제기부터 등장한 대표적인 무덤 양식입니다. 재현된 5호분 내부를 보니 비록 레플리카에 불과하지만 상당히 실감이 납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널길은 높이와 폭이 약 1m 수준으로, 무릎을 완전히 굽혀 기듯이 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돌로 만들어진 굴방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시신과 껴묻거리를 담아둔 널방입니다. 바닥은 사각형이지만 천장은 돔 형태로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점차 공간이 좁아지죠. 벽면에는 백회를 바른 흔적도 재현해 놓았습니다.
입구와 씨름하며 5호분 레플리카를 나옵니다. 이어 6호분입니다. 6호분과 5호분은 비슷한 웅진 시기의 무덤이면서도,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듯한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5호분 내부가 자연석을 소재로 거칠고 투박한 질감의 느낌을 전달했다면, 6호분은 인공적 소재인 벽돌로 무덤 전체를 아치와 직각의 이미지로 직조한 듯한 느낌입니다. 6호분은 건축 기교로는 무령왕릉에 미치지 못하나 그 구조는 거의 흡사합니다.
특히 6호분은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진 무덤 벽화로 매우 유명합니다. 백제 고분에서도 벽화는 상당히 희귀하며, 특히 전축분에 벽화가 그려진 사례는 6호분이 동아시아에서도 희소하다고 합니다.
6호분 레플리카는 무덤의 훼손 상태도 그대로 재현해 뒀기 때문에 각 벽면에 그려진 사신의 모습은 희미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서쪽 벽 백호의 모습만은 백제 사신도 특유의 유려함과 우아함이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이제 실제 왕릉원으로 향하겠습니다. 무령왕릉은 나중에 살펴보고 우선 이를 지나 1~4호분을 둘러봅니다.
왕릉원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1~4호분의 무덤은 5호분과 같이 한성시대에 유행했던 굴식돌방무덤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잠든 분들이 무령왕릉이나 6호분보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사람이라는 의미겠지요.
주인을 찾은 무령왕릉과 달리 1~4호분은 일제강점기 훨씬 전 이미 도굴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도 이제껏 추측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1500년이 흐른 2025년에서야 그 단서가 나오게 됐습니다.
제가 지난 2024년 여름 공주 왕릉원을 찾았을 때, 한참 1~4호분에 대한 재발굴 조사가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한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1호분과 2호분만 개토가 상당 부분 진행돼 있었는데, 실물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굴방 내부 무덤의 형태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재조사 과정에서 무덤의 주인을 찾을 획기적 단서가 나옵니다. 2025년 6월 국가유산청은 재조사 중 2호분에서 출토된 어금니 2점에 대한 법의학 분석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2호분에 묻힌 사람의 연령이 10대 중후반이었던 점이 확인된 것이죠.
즉 무덤 조성 시기와 피장자의 추정 연령을 고려하면, 2호분의 소년은 바로 10대에 사망한 백제 삼근왕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비운의 소년왕이 잠들었던 무덤을 비로소 알아낸 것이지요. 도굴꾼이 무신경하게 던져둔 어금니 하나가 무덤의 흙 속에서 나와 제 주인의 안식처를 증명해 준 것입니다.
2호분을 근거로, 먼저 조성됐을 1호분의 주인도 아버지 문주왕일 가능성마저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제기되는 상황이지요. 아쉽게도 1호분에서는 주인을 특정할 단서를 아직 찾지 못했지만요.
그래도 언젠가 고고학과 법의학의 도움으로 왕릉원의 무덤들이 모두 주인의 이름을 찾을 날들이 있겠지요.
다시 왕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곳 2호분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삼근왕은 재위 2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정황상 암살로 추정됩니다.
유력 용의자는 바로 진 씨 가문입니다.
전술했듯 진 씨 가문은 해구 세력을 몰아냈는데, 그 해구가 세웠던 왕이 삼근왕인만큼 그들로서는 다른 바지사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삼근왕이 몇 년 후면 친정이 가능한 나이가 된다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했을지 모르지요.
진 씨가 고른 백제의 새로운 바지사장은 왕족 부여곤지의 아들이었습니다.
곤지는 한성을 잃고 전사한 백제 개로왕의 동생입니다. 곤지에게는 개로왕과 문주왕이 형이요, 삼근왕은 조카인 셈입니다.
곤지는 일찍이 개로왕 시절부터 행정과 외교 측면에서 그 유능함을 인정받았습니다. 개로왕이 하사한 정로장군 작위를 중국 송나라 황제에게서 인정받았고, 백제 왕실에서 따로 좌현왕이라는 왕의 작위도 받은 인물이지요.
이후 약 15년간 일본에 파견돼 왜 왕실과의 군사적 협력을 도모하던 곤지는 475년, 한성이 고구려군에게 함락당하고 웅진에서 문주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에 급히 왜에서 백제로 향합니다.
귀족이 득세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믿을 것이 혈육밖에 없었던 문주왕은 동생 곤지를 좌평 중 으뜸인 내신좌평에 임명합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 곤지는 돌연 급사하고 맙니다. 문주왕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을 당하지요.
진 씨 가문은 바로 이 곤지의 다섯 아들 중 일본에 남겨둔 둘째를 왕위에 올리기로 한 것입니다. 곤지 지지파인 일부 왕족도 진 씨 세력의 계획에 동참하면서, 10대 중반의 어린 왕자가 왜국에서 서해 바다를 건너 웅진 땅으로 향했지요.
이에 왕위에 오른 임금이 24대 동성왕입니다. 웅진백제역사관에는 다른 왕들과 달리 동성왕만 차양식 투구를 쓰고, 말 등에서 갑주를 입은 채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은 담력이 크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일 정도로 궁술 실력이 빼어났다고 합니다. 무인적 기질이 짙었던 왕인가 봅니다.
일본서기는 동성왕이 즉위 시 백제로 떠나면서 왜의 축자국(筑紫國), 현재 규슈 지역의 병력 500명을 함께 대동했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동성왕이 나고 자란 왜에는 과거 아버지 곤지가 다져놓은 기반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습니다.
반면 10대에 왕위에 오른 동성왕에게 아버지의 고향 백제는 서툴고 낯설기만 한 땅이었을 테지요. 지지 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한성 출신 귀족들의 전횡을 보면 상당한 고립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동성왕은 한성 출신 구귀족을 견제할 세력으로 금강과 웅진 일대 신흥 귀족들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웅진 기반 귀족들은 백제 왕실의 웅진 천도에 적잖이 기여했음에도, 구귀족의 권력 독점으로 인해 핵심 요직에도 오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왕실과 이들 신진 귀족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을 확인한 동성왕은 재위 8년 차부터 본격적인 세력 교체에 나서게 됩니다.
왕은 우선 웅진 출신 귀족 백 씨 출신 ‘백가’를 궁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위사좌평’에 전격 발탁했습니다. 백 씨 가문은 앞서 본 수촌리 재지 세력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가문이기도 합니다.
더욱 파격적인 ‘깜짝 인사’는 왕이 재위 19년을 맞은 497년에 나왔습니다. 왕은 병권을 좌지우지하는 핵심 요직인 병관좌평에 웅진 귀족인 연돌을 임명합니다. 진 씨 등 구귀족이 도맡았던 병관좌평이 처음으로 웅진 출신 귀족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간 병관좌평을 맡은 구귀족들이 왕위를 갈아치웠는데 이제 이런 행각에 제동을 걸겠다는 왕의 선언이었습니다.
동성왕과 무령왕대에 이르면서 백 씨, 연 씨, 사 씨, 인 씨, 비씨 등 그간 기록에서 잘 나타나지 않던 성씨의 관료와 귀족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도 동성왕의 비범한 정치 감각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죠.
어느 정도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고 생각한 왕은 웅진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축 등을 통한 왕권 강화 시도에 이어, 귀족들의 힘을 꺾을 마지막 퍼즐을 준비합니다.
동성왕 12년인 490년, 삼국사기에는 왕이 사비 벌판에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사비는 잘 알려졌듯이 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입니다.
이후 사비에 대한 기록은 한동안 끊기다가, 동성왕 23년 겨울 다시 사비 동쪽 벌판과 서쪽 벌판에서 사냥을 나갔다는 기사가 잇달아 등장합니다. 앞서 동성왕은 같은 해 여름에는 사비 일대에 핵심 거점인 가림성을 새로 쌓게 하죠.
고대사회에서 왕의 사냥이나 순행은 단순한 유희가 아닙니다. 일부 학자들은 동성왕의 사비행과 가림성 축조가 모두 하나의 뚜렷한 목표 하에서 실행된 행동이라고 봅니다. 왕은 바로 사비로의 천도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도 준비를 앞두고 왕은 자신의 친위세력에 대한 개편에도 착수했습니다. 신진 귀족들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 계해서였습니다. 왕은 자신이 믿을 수 있던 측근 백가를 우선 가림성주로 임명합니다. 물론 백가의 기반이 웅진이었으므로, 근거지를 사비로 이주시켜 그 힘을 약화하겠다는 복심도 있었을 터죠.
그해 11월. 사냥을 위해 사비 서쪽 벌판에 나왔다 폭설에 발이 묶인 동성왕은 자객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고,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한 채 사망했습니다.
자객을 보낸 이는 동성왕의 최측근, 백가였고요.
사비 천도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발에 잇단 토목 공사로 민심마저 이반 되면서, 결국 동성왕의 개혁도 멈춰 서고 만 것입니다.
이곳 공주의 왕릉원 어딘가에도 피살된 동성왕의 무덤이 남아 있겠지요.
왕릉원에서는 4호분 무덤이 종종 동성왕의 추정 무덤으로 거론되고는 합니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동맹 강화를 위해 신라 귀족의 딸과 혼인했는데, 4호분에서 나온 은제 허리띠장식이 경주 금관총의 양식과 동일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도 어디까지나 추정의 영역입니다. 실패한 개혁군주 동성왕은 그렇게 침묵을 지킨 채 공주에 어딘가에 아직까지 잠들어 있습니다.
왕릉원의 골짜기에서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웅진 시대는 배반의 열풍에 신뢰가 질식하는 시대였습니다.
꼭 웅진 때뿐이겠습니까.
역사책을 덮고 주변만 불러봐도, 곁에서 함께 웃어주던 이들의 혀 끝, 손 끝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을 테지요.
배신은 언제나 인간을 낯설게 만듭니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근대사회가 신용을 제도의 언어로 환원하면서, 현대인들이 이렇게 유독 상처 입을 순간들이 많아진 것일까요.
배신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겠지요.
고립이 최고의 호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를 단단히 닫아걸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립은 보호막이 아니라 서서히 자라나는 벽에 가까웠지요.
생채기가 무서워 그렇게 살아갔더니 제 자신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했고 단절만 가속화될 뿐이었거든요.
결국 믿음과 관계란 기본적으로 상처받을 각오를 품고, 다칠 줄을 뻔히 알면서도 손을 내미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관계의 본질임을 알게 된 이상, 순진무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 대신 우리는 더욱 진실하고 대담해질 수 있습니다.
웅진 시대도 이렇게 무너진 질서의 한복판을 딛고 무모한 신뢰와 수많은 상처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었을 테지요.
바로 그런 과정을 정면으로 밟아간 왕을, 다음 답사길에서 만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