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웅진(6)] 고난 속의 굴기, 무령왕릉(下)

by whiteshore

유물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무령왕릉에서 백제 예술의 정수를 느끼자면 단연 금속공예품들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무령왕릉의 유물들은 재료의 원산지와 제품 생산지가 매우 국제적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가 말해주듯 이런 금빛 찬란한 장신구들 대다수는 백제에서 직접 제작된 것들이죠.


정상까지 끌어올린 공예기술과 백제 장인의 뛰어난 미감이 '화학적'으로 응집된 걸작들입니다.


3472594408673985872.jfif 왕의 머리 편에서 발견된 '무령왕 금제 뒤꽂이'.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특히 정교한 기술로 왕실의 이상을 시각화한 왕과 왕비의 금제 꾸미개는 세련미를 극명히 뽐냅니다. 99% 순도의 금판을 종잇장처럼 얇게 펴고, 또 오차 없는 솜씨로 오려낸 한국 고대 미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이견이 없기 때문인지, 왕의 꾸미개는 국립공주박물관의 웅진백제실, 왕비의 것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백제실의 상석에서 각기 그 위용을 발하고 있습니다.


3472594459357071952.jfif 무령왕 금제 관식. 왕의 관모에 부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왕의 금관 꾸미개는 마치 여러 갈래의 불꽃이 강렬하고 역동적으로 타오르는 모습이 특징입니다.


왕비의 꾸미개는 보다 정적이지만, 봉긋한 연꽃 봉우리가 막 세상에 피어오른 순간을 금판에 빚어냈지요.


말할 것도 없이 불꽃과 연꽃은 불교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입니다. 화염은 온갖 번뇌를 불살라 세상을 정화하고 밝히는 힘이요, 연꽃은 지혜와 자비를 피워내는 깨달음의 결실을 의미합니다.


3472594408680994896.jfif 무령왕비 금제 관식.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2025년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용과 봉황을 통해 제왕적 권위를 내세우면서도, 불국토의 전륜성왕과 같이 자비로움으로 신민을 어루만지겠다는 왕실의 이상이 반영된 듯합니다.


동아시아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역작을 남긴 장인 일부는 그 이름을 역사에 새기는 행운도 얻었습니다. 백제 왕비의 손목을 장식했을 은팔찌 1쌍을 제작한 다리(多利)가 그 주인공입니다. 용 두 마리가 조각된 은팔찌의 안쪽에는 "다리(多利)가 대부인(大夫人)을 위해 은 230주(主)를 들여 만들었다."는 명문이 적혀 있습니다. 다리가 백제의 대부인을 위해 팔찌를 만들었다는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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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비의 은제 팔찌로 2점이 왕비의 관 안에서 출토됐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그 주인인 왕비도 남기지 못한 이름을 전한 것으로, 신라의 양지와 함께 사실상 유이하게 자신의 작품과 이름을 후세에 함께 알린 삼국시대의 예술가이지요.


이런 무령왕대 백제 문화의 개화는 안정된 내치라는 토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왕권을 다진 무령왕은 선대 동성왕이 실패했던 민생 안정과 이를 통한 왕실의 경제적 기반 확충에 주력합니다. 삼국사기에는 510년 왕이 지역의 제방을 튼튼하게 하고, 중앙과 지방의 유식자들에게 농사를 장려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를 학자들은 무령왕 대에 본격적으로 미개척지에 가까웠던 금강 일대와 호남평야에 대한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평가합니다.


일본서기에도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기사가 나오는데, 509년에 이전의 혼란으로 가야 일대로 넘어가 있던 백제 유민들을 찾아내 백제의 호적에 도로 편입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반도의 핵심 곡창인 호남평야는 이렇게 오래전 백제인의 쟁기질이 빚어낸 결과물이었던 것이죠.


3472594408283397456.jfif 백제의 농업은 적극적인 개간 사업과 수리 기술에 힘입어 발전했다. 백제역사문화관에서 촬영.


아울러 무령왕은 생산력 증대를 토대로 한성 점령 이후 흔들렸던 남쪽 가야에 대한 지배권과 회복에 나섭니다. 남정 끝에 왕은 전남 남원과 임실, 경남 하동군 등 섬진강 일대의 광대한 농토에 대한 영향력을 직접 행사하게 되지요.


3472594408683051344.jfif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무령왕릉에서 보이는 예술적 성취는 백제는 물론, 후대 동아시아 문화의 자양분이 됩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은잔이 대표적입니다.


동탁은잔은 청동 받침 위에 높이 15cm 은잔과 뚜껑을 올린 모양입니다. 잔의 위쪽 표면에는 신선이 사는 고혹한 산봉우리와 이 사이를 노니는 봉황이, 아래쪽에는 상서로움을 감춘 용이 정밀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대향로와 유사한 구조지요.


후대 외리 출토 산수문 벽돌이나 금동대향로 등 백제미술의 역작에 영감을 제시했을 기본적 도상(圖像)이 이미 갖춰져 있는 셈입니다. 훗날 절정에 오른 백제 사비 문화의 미적 감수성은 무령왕 대에 이미 태동한 것입니다.


3472594459355156304.jfif 무령왕릉 출토 동탁은잔에 새겨진 봉황과 산봉우리의 모습. 훗날 금동대향로라는 걸작의 바탕이 된다.





외정, 고구려를 격파하고 ‘갱위강국’을 이루다.


국력 신장을 이뤄낸 무령왕은 이윽고 북방으로 눈을 돌립니다. 조상이 묻힌 옛 한성 땅, 고토 경략은 왕실의 숙원이었을 뿐 아니라, 왕 자신이 친위세력으로 끌어들인 범부여계의 지지를 얻기에도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바다 건너 중국 남조와 왜, 그리고 신라와의 외교적 연대를 토대로 마침내 고구려와의 정면 대결에 나서기로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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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일대에서 출토된 백제 기병들의 마구와 철제 창.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삼국사기에는 무령왕 때 연천과 북한산 등 한강 유역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들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이 백제의 군사 활동과 관련된 기사로, 보통 한강 유역 일부에서 백제가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에 무령왕은 재위 21년 중국 양나라에 보낸 국서를 통해서, 백제가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파해 다시 강국(갱위강국)이 됐다고 밝힙니다.


3472594408664701520.jfif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기사에서 백제가 '갱위강국'이 되었다는 국서의 내용이 담겨있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백제의 자신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중국 양나라 때 외교 사절을 묘사한 ‘양직공도’에는 백제 인근에 작은 나라들이 있고, 이들 나라가 모두 백제에 종속(부용)하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즉 가야 여러 나라와 신라, 그리고 무령왕 대 점령한 섬진강 일대 소국들 9곳이 백제의 부용국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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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공도 내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를 토대로 재현한 백제 국사의 모습. 한성백제박물관(좌)과 롯데월드민속박물관(우)에서 촬영


이 시기만 해도 신라와 가야는 백제를 통해서만 바다 건너 중국과의 외교가 가능했습니다. 외교를 위해서는 백제의 안내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백제가 신라 법흥왕 때 신라 사신의 통역과 뱃길 안내 등을 도왔다는 기록마저 전합니다.


결국 양직공도에 기록된 묘사는 무령왕 시기 섬진강 일대 진출이라는 사실과 함께, 이런 외교적 역량을 백제가 양나라에 과장되게 전달한 결과물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백제의 군사·외교적 성과는 국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것 같습니다. 중국 양나라는 백제가 고구려를 격파해 갱위강국이 됐다는 내용의 국서를 받은 한 달 후, 무령왕에 영동대장군의 작호를 내립니다. 무령왕이라는 이름도 바로 영동대장군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이는 직전 고구려 안장왕이 제수받은 영동장군(3품)보다 한 단계 높은 2품의 관직입니다. 일반적으로 중국 역대 왕조가 삼국 중 고구려의 왕들을 더욱 높게 평가했다는 점을 보자면 이례적인 행보입니다.


3472594408663928400.jfif 무령왕릉 청자육이호. 여섯 개의 귀가 달려 이런 이름이 붙었다. 양나라가 준 부의품으로 추정된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당시는 중국 양나라의 최전성기로, 양은 영향력 확대를 위해 주변 국가들과 ‘전략적 제휴’를 모색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이 보기에도 고구려보다는 한반도 중남부에서 다시 영향력을 회복한 백제의 전략적 가치가 더욱 높았던 것이죠.


한편으로 백제는 양과의 외교적 제휴를 통해 선진적 문물과 제도의 전면 수용에 나섭니다. 이런 문명 교류의 물적 결정체는 물론 무령왕릉 그 자체입니다. 무령왕릉은 구조부터 제작 방식까지 중국 남조(양)의 영향이 매우 짙습니다. 왕릉의 묘제까지 한 세대 만에 교체하는 파격을 감수하며, 백제는 중흥의 그날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무령왕은 단순히 백제 중흥의 상징인물은 아닙니다. 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무령왕은 백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에 지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의 탄생 자체가 이미 국제적이지요.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는 현재 일본 규슈 일대의 한 섬, 각라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왕은 재위 동안에도 동아시아의 공통 유산인 유학을 전할 오경박사를 파견하는 등, 왜와의 외교 관계를 굳건히 하는 데 힘썼습니다. 이로써 백제와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 전역을 잇는 문화적 네트워크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무령왕의 관에 쓰인 금송은 백제가 일본과 맺은 외교적 신뢰와 우정을 상징하는 유물입니다. 왜측의 정성 어린 답례였던 이 금송은 무령왕 이후 백제 왕실에서 대대로 관재로 사용되며, 그의 외교적 업적이 후대에도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3472594408679972944.jfif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관. 일본산 금송으로 제작된 것으로 무덤 안에서 조립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01년 12월, 일본 아키히토 덴노는 자신의 68세 생일 연설에서 의외의 발언을 합니다.


그는 “간무(桓武)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과 인연을 느끼고 있다”며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었고, 이때 이래로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되기에 이르렀다.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줬다.”라고 직접 언급했습니다.


무령왕의 영향력이 백제라는 공간, 그리고 6세기라는 시간적 배경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비록 아시아를 휩쓴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로 근대에 이르러 한일 관계가 크게 어그러졌지만, 그 초석에는 1500년 전 무령왕이 뿌려둔 공생의 씨앗이 여전히 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무령왕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는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신뢰를 비춰보게 하는 거울임을 알게 됩니다.


타자와 세계를 향한 신뢰나 이해 대신, 일시적인 힘의 우위나 논리로 관계를 정립하면 곧 그 자신도 고립과 상처에 발목이 묶이게 되는 것은 개인이나 공동체나 매한가지입니다.


무령왕이 뿌린 공생과 교류의 씨앗은, 단순한 외교적 업적에서 나아가 서로 다른 문화와 사람을 이해하고 연결하는 태도를 후대인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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