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웅진(7)] 정지산, 인내로 빚은 마지막 여정

by whiteshore

왕릉원 뒤편, 송산의 능선 따라 난 탐방로는 호젓이 걷기 좋습니다. 탐방로는 곧 ‘무령왕릉 숲길’로 이어지고요.


여름 솔바람을 맞으며 금강 쪽으로 길을 잡으면 정지산 유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산'이라지만 야트막한 언덕으로 실상 송산의 북쪽 자락에 가깝습니다.


탐방로의 숲길에서 벗어나 데크로 된 나무계단을 오르니, 문득 탁 트인 평지가 나옵니다.


정지산 유적으로 향하는 숲길. 장례를 준비한 백제인들도 오르내린 길이었을까.


약 800평 남짓한 이곳 평지대가 정지산 유적입니다. 평탄지 안쪽에는 나무 말뚝이 종과 횡으로 열을 지어 서 있는 건물터가 2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와 건물이 있던 곳이고, 다른 하나는 대벽 건물지입니다.


나무 말뚝이 꽂혀 있는 곳은 건물의 목조 기둥이 있던 자리를 알아보기 쉽게 표시해 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목조건물에는 기둥을 받칠 주춧돌의 흔적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정지산의 건물들에는 주춧돌의 흔적이 없었던 탓입니다.


정지산 유적에서는 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아, 새로 세운 나무 기둥만 건물의 흔적을 간신히 알려주고 있다.


이는 이곳에 있던 건물이 일반 시설이 아닌, 백제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제의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크기의 건물이 어디에 있었겠구나 하는 정도는 알 수 있어서, 조금의 상상력만 빌려온다면 1400년 전 새하얀 상복을 입은 백제인들이 빈전을 오가며 애도하는 모습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정지산 유적 내 대벽 건물지 터


건물지에 올라서면 금강 북쪽의 경치와 동쪽 공산성의 모습이 제법 잘 보입니다. 유적지 아래로는 ‘정지산 터널’이 바로 지나고 있습니다. 주민에 들으니 원래는 이 일대를 통째로 깎아 백제큰다리와 연결되는 길을 내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95년 조사에서 백제 시대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유적 아래로 터널을 판 것이라고 하네요.

정지산 유적에서 바라본 금강과 공주 시내, 그리고 공산성.


1996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발굴조사에서는 연꽃 수막새 등 고급 기와의 흔적과 함께 그릇받침(기대), 세 발 그릇처럼 제사와 장례에서 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가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백제 왕실만이 공유했던 성스러운 사당과 왕들의 주검을 모셨던 빈전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정지산 유적을 복원한 모형. 백제역사문화관에서 촬영.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도 무령왕릉에 안치되기 전까지는 이곳 정지산의 빈전에 모셔졌을 것입니다. 실제 무령왕비 지석에 따르면 무령왕 왕비의 시신을 임시로 안치한 장소로 정지산이 유력하게 점쳐집니다.


정지산에서 왕릉원으로 무령왕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 가보지요.


523년 초여름, 무령왕이 웅진성 그러니까 현재의 공산성에서 향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왕의 시신은 곧 웅진성의 문을 나와 정지산의 빈전으로 옮겨지지요.


왕의 죽음을 알리는 연통이 백제 곳곳으로 전해지고, 곧 바다 건너 양나라와 왜의 조문객들도 흰색 휘장이 둘러진 빈전을 찾아 애도를 표합니다.


왕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청동거울. 똑같은 거푸집으로 만들어진 거울이 일본 군마현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양나라에서는 중국제 도자기와 오수전 등의 화폐를 노잣돈으로 제공하고, 왜의 사신들은 최고급 일본산 금송과 청동거울을 조문품으로 빈전에 올립니다. 멀리 동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유리구슬 수천 알은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무덤 전체에 흩뿌려질 예정이지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리옥. 구슬 일부에 포함된 납유리의 원산지는 현재의 태국 일대다.


왕의 시신은 정지산의 빈전에서 2년 4개월간 사실상 가매장의 형태로 유골만 남을 때까지 모셔집니다.


이를 빈장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에도 이런 유습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울러 중국 남조의 관습도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지요.


중국 남조는 사나운 유목민 왕조에 의해 화북을 뺏기고, 장강 이남으로 밀려났습니다.


이들도 백제인들처럼 실지 회복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지요. 이 때문에 남조계 왕조에서는 북방 수복을 대비해 왕족의 이장이 쉽도록 무덤을 벽돌로 만들고, 장례 절차도 간소히 했다고 합니다.


동병상련을 앓던 백제인들도 마찬가지였겠지요. 28개월이 걸린 무령왕의 빈장은 어쩌면 고인을 애도하는 동시에 고토 회복의 결기도 다지는 의식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525년 8월 12일. 마침내 왕의 장례식이 거행됩니다. 뼈만 남은 무령왕의 유해가 엄숙한 장례 행렬과 함께 송산의 작은 골짜기 앞 ‘대묘’, 즉 무령왕릉으로 운구됐을 테지요. 중국 남조 황족들이 묻혔던 것과 같은 방식의 정교하고 화려한 벽돌무덤입니다.


무령왕의 무덤을 실제 크기로 복원한 레플리카. 롯데월드민속박물관에서 촬영.


무덤방에서 250kg이 넘는 목관의 조립이 이뤄지고, 이어 유골과 부의품이 안치됩니다. 일본 남부에서만 자라는 금송을 정성스레 자르고, 검게 옻칠해 물이 새지도 쉽게 썩지도 않는 관입니다. 조립된 관 안에는 왕의 유골과 부의품이 정성스레 모셔집니다.


입구가 닫히던 마지막 날, 백제인들은 손수 5곳의 등감과 입구 바닥에 6개의 등촉을 바닥에 둡니다. 등잔이 영원불멸하게 왕릉을 환히 밝히기를 바랐겠지요. 마지막 제사상에는 왕이 생전 좋아했던 은어 3마리가 소박히 오릅니다.


무령왕릉 무덤 벽면에 만들어진 등감에서 발견된 등잔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촬영.

마지막으로 무덤 입구에는 묘지석과 진묘수가 놓입니다. 묘지석에서 백제인들은 왕의 죽음을 황제의 죽음, 즉 ‘붕(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옆에는 무령왕이 사망한 해에 발행된 중국 양나라의 화폐, 오수전의 꾸러미가 있습니다. 토지신에 땅값을 지불하기 위함입니다. ‘신과의 거래’이니 현실 세계, 즉 백제의 법령(율령)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조항으로 지석은 끝이 나지요.




정지산의 빈전에는 웅진시대를 거쳐간 많은 왕들의 유해가 올랐습니다.


왕들의 운명은 위기 극복을 위한 인내의 근육을 얼마나 단단히 길러놓았는가에 따라 갈렸지요.


무령왕 자신도 마치 웅진시대를 압축한 듯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전반기는 늘 위태로웠고, 인내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왕은 조급해하지 않고, 눈앞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에만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기회가 들어올 문을 넓혀 두었던 그는, 때가 왔을 때는 거침없이 이를 움켜쥐었고요.

흔들리고 지칠수록 눈앞의 작은 발걸음 하나가 미래를 만드는 거대한 힘임을 우리는 쉽게 망각합니다.


그러나 '희망의 땅' 공주를 거쳐 간 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백제의 왕들이 그러했고 공주에서 위기를 이겨낸 고려의 현종과 조선의 인조도 마찬가지였지요.


길을 찾아내는 강력한 힘은 언제나 인내에서 만들어지는 회복탄력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정지산의 고목과 바람이 속삭이듯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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