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여행지인 부여로 떠나기 전, 잠시 백제인들의 ‘회복 탄력’의 원형을 찾아가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백제인들은 낙관을 잃는 법이 좀체 없습니다. 남도의 끝 모를 평야와 일렁이는 서해가 길러낸 여유로움입니다.
이런 정신적 풍요로움은 백제인들이 직접 빚어낸 불상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소위 ‘백제의 미소’는 백제인의 최대 장기인 회복력의 근간이자, 곧 그런 성숙한 정신의 직접적인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우아하고 절제된 관음보살의 미소는 마주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바위에 새겨진 백제불(佛)의 천진난만한 웃음은 시간을 넘어 순진무구의 감정을 그대로 전이시키고요.
가을이 찾아오면 옛 백제의 들과 바다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1400년 전 백제인들의 다양한 얼굴을 만나보러 떠나봅시다.
초가을의 어느 날, 충남 서산과 태안 일대로 길을 잡았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서산시, 거기서 다시 남서쪽으로 이동해 태안군에 도착합니다. 백제 땅에 가장 먼저 이른 세 분의 부처님들을 뵙기 위해서입니다.
도착한 태안은 조용한 고장입니다.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어촌과 미항들이 줄지어 있지요. 마침 꽃게 풍어 소식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주민분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
백제 때는 이곳을 성대혜현(省大兮縣)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태안은 당시 백제인들이 중국 산둥반도나 강남 지역으로 향하는 서해 연안 항로의 출발지였지요. 아울러 대륙의 문화와 문물을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받아들인 기착지이기도 했습니다.
불교문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안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화산입니다. 300미터 수준의 야트막한 산으로 이곳에 바로 고대 동아시아 불교문화 교류의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지역민들에게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을 찾아간다고 말하자, 정작 관광객들도 많이 찾지는 않는 곳이라는 말을 들려줍니다. 아무래도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보다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는 탓이겠지만, 엄연히 서산 마애불과 함께 국보로 지정이 된 중요 국가유산입니다.
불상이 있는 백화산을 차로 조금 오르자 작은 암자가 하나 나옵니다. 암자 뒤편에 기와가 덮인 전각이 바로 눈에 들어옵니다. 감실로 들어서니 거대한 바위에 바로 두 구의 부처와 한 구의 보살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불상은 풍화가 심해 안면의 미소를 겨우 알아볼 정도입니다. 그래도 불상의 법의는 양감이 제대로 살아있고, 불상의 얼굴 역시 강건한 모습입니다.
양 옆의 여래의 키는 3미터에 가깝고 중앙의 보살도 2미터 수준입니다. 남아있는 이목구비도 인상적입니다.
풍화는 아쉽지만 그럼에도 신기하게 역동성은 살아있어 마치 바위에서 막 현신하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상상도 하게 됩니다.
마애삼존불은 당시 중국에서 성행한 석굴이나 바위 부조를 형식적으로 모방했습니다. 그러니 백제인들답게 과감한 양식 비틀기도 나타나지요.
삼존불의 경우 보통 중앙에 부처가, 양 옆에 보살이 있는 형식이 많습니다. 그러나 태안마애삼존불은 마치 양 옆의 거대한 부처가 중앙의 보살을 호위하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형태지요. 법의의 매듭 등도 백제 등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불상 고유의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고요.
더욱 큰 특징은 부처와 보살이 딛고 있는 연꽃 모양의 대좌입니다. 1995년 마애삼존불상 보수작업 시 토사에 묻혀 있던 하반신을 발굴하기로 결정했는데, 백제 때의 연화 대좌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거든요.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백화산 인근에는 원래 미군 부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어 대한민국 공군과 육군 부대도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 때문에 이 ‘백제의 연꽃’을 다시 피워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각을 내려오는 길에 삼존불을 찾는 객을 만났습니다. 외지인인데 인사를 드리고 가고 싶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 앞 탁자에는 어느 불자분께서 보시한 공양미도 놓여 있습니다.
태안의 삼존불이 죽은 문화유산이 아닌 1400년 전과 다르지 않게 여전히 지역민들에게 추앙받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점을 새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과거 태안 앞바다, 특히 안흥량은 물살이 험하고 암초가 많아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릴 정도로 뱃길이 위험했습니다. 두 여래 사이 중앙에 자비로움을 나타내는 관음보살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뱃길의 안전을 기원했던 염원을 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서해 바닷가에서 시작된 백제인의 마애불 조성은 내륙에서는 보 세련된 방식으로 진화합니다.
태안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는 서산시가 있습니다. 충청남도 서산의 가야산 자락, 용현리 계곡에는 바위에 아로새긴 백제 시대의 삼존불이 있지요.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상은 보존 상태가 매우 좋고, 신비로우면서도 오묘한 미소를 만면에 짓고 있어 명실공히 ‘백제의 미소’를 대표하는 조각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태안의 것과는 다르게 서산의 삼존불상은 여래 즉 석가모니불이 가장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어느 정도 정형화된 양식을 따르는 모범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앙의 본존불은 위엄 대신 친근함이 가득한 얼굴로 가야산에 오르는 이들을 맞고 있습니다. 둥글고 풍만한 얼굴에는 아이가 짓는 것처럼 맑고 또 넉넉한 미소가 떠오릅니다. 마치 "어서 오게. 오랜만에 잘 왔네."하고 반겨주는 듯한 인간적인 웃음입니다.
양 옆의 보살들도 보면 자연히 웃음을 짓게 하는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본존불의 오른쪽 편에는 보관을 쓴 협시 보살이 두 손으로 보주를 맞잡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매우 특이하게 미륵보살의 반가사유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습니다. 다른 여타 반가사유상 조각들의 잔잔한 미소와는 달리 천진난만한 미소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 불상들의 미소가 얼마나 친근했는지 이런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마애불은 1959년에야 다시 세상에 드러났는데 이를 발견한 사람은 홍사준 당시 국립부여박물관 관장이었습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삼존불의 중앙 본존불을 산신령 조각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왼편의 보살들은 산신령의 부인들이라고 생각했다지요. 좌측이 부인이 손을 턱으로 가리키며 놀리자, 오른쪽의 부인이 화가 나 두 손으로 짱돌을 쥐고 있는 모습이라고 상상했다고 합니다.
마애삼존불 바로 인근에는 보원사지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잠시 보원사지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보원사는 백제 때 창건된 사찰이지요. 고려시대 때까지 절에 머문 승려만 1000명에 달할 정도로 번창했지만, 지금은 수풀과 석탑, 그리고 부도 만이 남아 있습니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백제 때의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2025년 12월에는 국보 지정도 앞두고 있지요. 서산 마애불을 새겼던 백제인의 정신이 고려 초기까지 남아 이 지역의 석탑 조성에도 영향을 준 것이겠지요.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는 혼란했던 백제 후기, 부여와 태안의 길목을 오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삶이란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것이지만 결국은 다시금 나아가는 것이라는 백제인의 낙관적 정신을 그대로 담은 아이콘이지요.
오후 햇살이 암벽의 미소를 다시 거둬갈 때 즈음, 백제인들의 온화한 인사를 마음 속에 새긴 채 또 다른 얼굴들을 대하러 갑니다.
마애불처럼 중국의 관음신앙도 대륙에 전래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해를 건너 백제 땅에 전해집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불상과 이를 본뜬 관음상 등이 신앙의 대상이 됐지만, 곧 백제인의 불심으로 빚어낸 백제 고유의 불상이 만들어지지요.
우선 국립공주박물관에 모셔진 관음보살을 먼저 뵈러 가볼까요.
박물관 2층 충남역사실의 중앙에는 높이 25cm의 관음상 하나가 고혹의 자태를 뽐냅니다. 그리 크지 않은 입상이지만 관람객들의 시선이 한 번씩은 향하는 불상이지요.
1974년 공주시 의당면의 한 절터에서 발견됐다는 불상은 그 조형의 우수함과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조각상은 관음보살의 상징인 삼면의 보관을 쓴 채 땋아서 어깨까지 늘어뜨린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역시 관음의 상징인 정병을 왼손에 들고 있습니다.
특히 머리 사이로 보살의 둥근 얼굴에 깃든 안온한 미소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불상의 보존 상태는 상당히 좋아서 얼굴 부분의 도금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웃음을 띠고 있는 입가는 주위 근육의 모습까지 생생하고 또 사실적입니다.
얼굴은 비교적 절제된 모습이지만, 전체적인 조형은 유려하고 힘이 있습니다. 얇은 천의와 군의의 주름에서도 입체감이 느껴집니다. 보살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8장의 연꽃잎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또한 백제 불상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남아있는 유물을 보면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 지금의 충남 부여에서도 이런 관음 신앙이 크게 유행했던 것 같습니다. 사비에는 과거 30여 개의 크고 작은 절이 있었다고 추정될 정도로 불교가 성행했습니다.
많은 부처와 보살 중에서도 당시 민중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바로 관음보살이었지요.
국립부여박물관에는 ‘미스 백제’로 불리는 국보 제293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 입상이 있습니다.
넉넉한 얼굴에 담긴 부드러운 미소는 역시 공주 의당 관음보살상과 닮았지만, 부여의 관음보살은 보다 절제된 표정에서 나오는 귀족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합니다.
여기에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친 불신의 형태는 가냘픔이 느껴지고요, 밑으로 내린 왼손의 엄지와 검지가 주름진 옷가락을 살포시 잡고 있는 우아한 모습입니다.
이런 백제식 관음보살의 미적 정점은 백제의 망국 직전인 650년 즈음에 만들어진 금동관음보살상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아쉽게도 해당 불상은 현재 일본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멸망하기 직전인 1907년 부여의 절터에서 발견된 불상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구입했고, 해방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지요. 지난 2024년 특별전시 형태로 100여년 만에 잠시 고국 땅을 밟았지만, 관음보살의 귀향은 아직까지 요원해 보입니다.
발굴 직후 부여관음보살상의 원형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총독부가 남긴 원판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흑백사진만 남아 있기 때문에 직접 컬러로 보정을 해 봤는데, 본연의 미소가 비교적 잘 살아납니다.
역시 삼면보관을 쓴 불상은 어느 관음상보다 이목구비의 균형이 잘 잡혀있습니다. 이전 관음보살들보다 더욱 갸름한 얼굴에 버들잎 같은 긴 눈은 눈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시원한 콧날 밑으로는 입매가 살포시 올리며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지요.
잘록한 허리를 살짝 틀고 있는 가운데, 하늘거리는 천의의 세세한 주름이 더해져 불상 특유의 수려한 모습을 더욱 배가시킵니다. 만약 국내에 소재해 있다면 별 이견 없이 국보로 지정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지요.
이들 백제 관음상은 주로 7세기 대 작품이 많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제를 비롯해, 이 시기 삼국에서는 관음상이 대유행합니다.
바로 7세기 한반도가 전쟁의 시대였기 때문일 겁니다. 관음보살은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생을 고난에서 구제하고, 위로를 주는 자비의 화신으로 그려집니다.
위난이 닥쳤을 때 마음으로 관음의 이름을 되뇌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관음 신앙의 핵심입니다.
어려운 계율에서 벗어난 직관적이고 현세구복적 교리는 동아시아로 전해지자마자 민중들의 마음을 빠르게 파고들었습니다.
관음보살의 미소는 바로 전란으로 고달픈 삶을 이어가던 백성들에게 전한 위로의 웃음이었을 테지요.